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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워리어와의 연애

반년째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다. 이틀 전, 그가 이메일 주소를 건네며 지난겨울 함께 다녀온 일본 여행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알파벳 다섯 글자 뒤에 숫자 ‘1234’를 덧붙인 흔할 것 같은 그의 아이디를 네 군데 검색 엔진에 입력했다. 촌스러운 블로그 활동 같은 흑역사를 발견하면 캡처해두었다가 놀려줘야겠다 싶었다. 올해의 활동 기록은 거의 없었고, 세 번째 페이지로 넘기자 작년 기록이 나열됐다. 그가 수백 개의 댓글을 남긴 한 사이트가 눈에 띄었다. 클릭했다. 수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한국 여자를 혐오하는 남성들의 모임 사이트였다. 남자친구가 쓴 글과 댓글을 읽었다. ‘김치녀’라는 단어와 거북한 여성 비하 표현으로 도배된 그의 글. 여자 연예인들의 사진을 마구 난도질해 올린 게시물도 있다. 2010년에 남긴 흔적까지 모조리 찾아냈다. 파헤칠수록 고약한 댓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제 오후, 그와 마주 앉았다. 순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이틀 전 찾아낸 그의 온라인 행적을 따져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그런 걸 왜 뒤져? 요즘 인터넷에 댓글 안 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심심풀이로 해본 거야.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잊어.”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찜찜하다. 그가 쓴 잔인한 글들은 도저히 그러려니 할 수가 없다. 오늘 저녁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할 참이다. _H, 교사·30세

 

난잡했던 너의 밤

은행 업무를 보러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우연히 손에 든 그의 스마트폰. 이것저것 구경하다 카톡이 아닌 낯선 메신저 앱을 발견해 접속했다. 9명이 속한 단체 채팅방 하나가 개설되어 있다. 내 남자친구를 포함한 아홉 남자가 수많은 메시지와 사진, 영상을 주고받은 날짜는 2015년 3월. 나는 경악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성적인 농담이 주르르 쏟아졌다. ‘어젯밤 하얀 치마 입은 애는 진짜 맛있게 생겼더라.’ ‘토요일 안마방은 어땠어?’ ‘파마한 애 가슴 라인이 죽이던데.’ 사진과 영상은 더 충격적이다. 난생처음 보는 어두컴컴한 방에 대여섯 명의 헐벗은 남녀가 술병과 함께 마구 뒤엉켜 있었다. 사진 속에서 잔뜩 상기된 남자친구의 얼굴을 찾았다. 영상을 재생했다.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은행 창구에 앉아 있던 남자친구가 내 옆으로 뛰어왔다. 채팅방을 열어둔 채 그의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줬다. “그게 아니고, 내 말 좀 들어봐. 너랑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야. 그냥 남자들끼리 술 마신 거야. 제발 오해하지 마.” 어지러웠다. 저녁이 될 때까지 그의 변명은 계속됐고, 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로 우린 헤어졌다. _K, 회사원·29세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사귄 지 백 일째 되던 날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붙어 다닌 친한 친구 2명에게 남자친구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약속 장소인 강남역 근처 한 이자카야에 도착해 평소처럼 안부를 주고받은 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반응이 왜 이러지 싶었다. 평소 같으면 접시 몇 개쯤은 거뜬히 깨뜨릴 기세로 시끌시끌 수다를 떠는 친구들인데 그날 따라 유난히 잠잠했다. 술을 몇 잔씩 마셨는데도 여전히 분위기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처음이라 그런가 싶어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파했다. 며칠 후, 그 두 친구 중 한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망설이다 전화했어. 할 얘기가 있어서. 네 남자친구에 관한 얘기야.” 한참 뜸들이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그날 함께 있던 또 한 명의 친구가 내 남자친구와 아는 사이라고 했다. 내 친구가 지난 겨울 술에 취해 함께 밤을 보내고 썸만 타다 끝난 남자가 바로 그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전해 들었던 클럽남 스토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머리가 멍해졌다.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이상하게 꼬인 관계를 설명했고 몇 시간을 울고불고하다 결국 우린 깨졌다. 내 남자친구와 썸 탔던 친구와는 여전히 어색한 상태로 지낸다. _K, 일러스트레이터·26세

 

셋이 하는 동거

잠자는 시간 빼고는 늘 딱 붙어 다니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진득하게 연애한 지 1년쯤 되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같이 살아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OK 했고 바리바리 짐을 챙겨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비극은 첫날부터 시작됐다. 옷장에 코트를 걸어 넣다가 발견한 파란색 여성 재킷은 내 옷이 아니었고, 침대 옆 서랍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하트가 그려진 핑크색 수면 양말은 남자친구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이후에도 비극은 계속됐다. 그의 공간에 적응되는가 싶으면 전 여자친구가 쓰던 물건이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촌스러운 귀고리 한짝, 쓰다 만 메이크업 리무버까지 발견한 날, 난 그 앞에서 대성통곡하며 이것들 모두 깡그리 치워버리라며 소리쳤다. 그렇게 한번 폭발한 후 전 여자친구의 물건을 맞닥뜨린 일은 없었지만 이미 다른 여자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는 공간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보면서 두 사람이 함께 했을 일상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3개월 동안 지낸 그의 집에 온전히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친구와의 동거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며칠 후 우리 연애도 끝났다. _S, 변호사·3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