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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징후는 연초부터 있었다. 출간한 지 3년이나 지난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그보다 더 오래된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느닷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리고 앞뒤로 김소월, 윤동주, 백석의 초판본 시집이 나란히 순위를 나눠 가졌다. 최근 교보문고는 올해 상반기 시·에세이 판매량이 25.2%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도서 판매 평균 성장률이 2%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록적인 수치다. 이 어리둥절한 열풍 속에서 6월 7일 시집만을 판매하는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 문을 열었다. 유희경 시인이 3평 남짓한 공간에서 2백여 권의 시를 판매하는 전문 서점으로 오픈 전 진행한 김소연 시인의 시 낭독회 입장권이 모두 팔렸다. 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시인 박준과 심보선의 시집의 경우 tvN의 책 소개 프로그램 <비밀 독서단>에 등장한 것이 폭발적인 증쇄를 이끈 일시적 반응이라 하더라도 박준, 오은, 황인찬 등 20~30대 청년 시인을 대상으로 형성되는 팬덤은 다소 의아한 현상이다. 인스타그램을 열고 ‘#황인찬’을 검색해보자.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라는 문장이 다양한 스타일의 캘리그래피로 표현돼 피드창을 뒤덮는다. 그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 수록된 ‘무화과 숲’이라는 작품의 시구다.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 낭독회 현장 스케치, 친필 사인 인증도 상당하다.

2~3년 전 트위터 속 140자 문장이 흥하던 때 누군가가 하이쿠와 트위터를 접목한 ‘트와이쿠(Twaiku)’의 세상이 올 것이라 예언했다. 예쁜 글씨체로 옮겨 적어 SNS에 올리기 좋은 한 줄, 순식간에 ‘좋아요’가 눌리고 리그램되는 시 한 구절이 친절한 설명문보다 호소력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140자도 길다. 그러다 보니 ‘이 열기가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시가 유행처럼 소비되는 것을 무조건 비판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사랑해줘’라고 호소할 만큼 한국문학에서 시는 지독히도 외면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상한 기류 속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시문학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담긴 두 개의 프로젝트가 발표된 것이다.

첫 번째는 ‘세계시인선’과 ‘오늘의 시인총서’를 통해 시문학 르네상스를 열었던 민음사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1973년부터 출간한 ‘세계시인선’을 새롭게 구성한 것. 세계시인선은 1970~80년 무렵 일본어 중역본만 있던 세계문학 서적들 사이에서 원문 번역을 시도하며 문학청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시리즈다. 현재 1차로 열다섯 권을 펴냈는데 커버를 바꾸고 번역을 수정하는 것을 넘어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시인과 작품을 시인선에 포함시켰다데 그 의미가 크다.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찰스 부코스키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물들의 춤>, 호라티우스 <소박함의 지혜>가 국내 초역 시집이다. 또한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미공개 시들을 더한 <사슴>, 추리소설로 더 잘 알려진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 <애너벨 리>도 포함돼 있다. 1973년 기획 당시 계획했던 100권 달성이 목표이며, 오는 2017년까지 50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왜 신춘문예는 단 서너 편의 작품만 보고 시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도 있다. 도서출판 삼인의 ‘삼인 시집선’은 한국문학의 어른인 평론가 황현산과 시인 김혜순, 김정한이 모여 신춘문예와 문예지 등단에 관한 아쉬움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됐다. 시집 한 권 분량을 채울 수 있는 만큼의 시 50~60편을 받아 시인을 선정하는데 첫 심사 결과가 발표되기 까지 3년이 걸렸다. 신춘문예를 통해 이미 등단한시인, 아직 데뷔하지 못한 신진 시인들의 투고작이 쏟아졌고, 세 명의 간행위원들은 한 달에 1~2회 정기 모임을 가져 두 명의 시인을 선정했다. 그 시작은 시인 유진목의 <연애의 책>과 조인선의 <시>. 먼저 유진목의 <연애의 책>은 황현산 평론가가 “한국 최고의 연애시”라고 단언할 정도로 아름다운 비극의 문장들이 가득하다. “풍경에 대해 생각하면 너는 곧장 생겨난다 풍경이라면 응당 너를 포함해야 한다는 듯이 유독 너에 대해서라면 고개를 끄덕일 마음이 되어 풍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다” ‘오늘의 날씨’의 일부다. 유진목의 연애시는 절절히 탐하고 들끓는 뜨거운 연애가 아니라 절정의 순간에서 한 걸음 물러서거나 과거의 절정을 되돌아보는 어딘가 안쓰러운 시다. 두번째로 선정된 조인선의 <시>는 힘이 넘친다. 단도직입적인 비판과 강렬한 인상이 시집 전체를 아우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일전에 자신의 책에서 심보선 시인의 작품을 두고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엄살의 능력은 곧 시인의 능력이라는 그는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라고 시 창작의 고뇌를 전했다. 사진 찍어 올리기 좋은 예쁜 표지와 ‘좋아요’를 부르는 한 줄의 문장이 21세기에 시가 살아남는 방법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문장들이 우리 삶을 위로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