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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기 위해 4분단에서 1분단을 돌아 사물함으로 갔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거짓말도 했다. 윤리 시간에 같은 조가 되면 그녀의 편에서 정의를 대변했다. 엎드려 졸고 있을 때조차 얼굴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두었다. 하지만 그 아이와 어울리는 커트 머리 여자 친구들 사이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랜 가슴앓이의 흔적은 수능 준비에 몰두하면서 일기장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각자 다른 대학교에 진학했고 몇 년이 지나 소셜 네트워크 ‘아이러브스쿨’ 정모에서 다시 만났다. 깊은 연정은 사라졌지만 내면에 깔린 친밀한 정서는 여전히 단단했다. 우린 순식간에 다시 가까워졌다.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과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의 환유에 대해 토론하고 함께 사북으로 출사 여행을 떠났다. 타인의 개입이 불가능한 뿌리 깊은 연대의 정서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 아, 성적 탐닉은 없었다. 우정을 기반으로 한 조금 유별난 관계였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깨진 건 내가 복학생 선배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아이는 분노가 극에 달해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내게 물건을 던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 욕을내뱉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니?”

그 아이의 마지막 외침은 연애의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떠오른다. 남자를 사랑할수록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한 사랑의 의미는 퇴색했다. 그래, 어떻게 남자를 사랑할 수 있지?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만들기 위한 생물학적 환영에 불과할 뿐, 남녀는 영원히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성적 대상으로서 상대방의 몸을 이해하는 수준도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하게 우월하다.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던 그 아이가 내겐 밀도 높은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동성애와는 차이가 있다. 성적 유희를 뛰어넘는 동질의 교감이 농밀하게 바탕에 깔린 사이. 나는 그것을 소울메이트, 즉 영혼의 동반자라고 말하고 싶다.

주변을 돌아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관계의 소울메이트 커플이 있다. 노희경 작가의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하는 ‘꼰대 이모’들도 그렇다. 초등학교 동문인 문정아(나문희)와 조희자(김혜자)에게는 각각 “동태찌개! 고춧가루 많이 넣고”라고 소리 치는 남편과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자식들이 있다. 정아가 이혼을 결심하자, 희자는 ‘정아야, 나랑 같이 살자’라고 말한다. 희자의 머릿속에는 남편과 자식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는 친구 정아가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이 삶의 목적이라면 이런 평생지기와 함께 살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짠돌이 남편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버리는 화병 따윈 생기지 않을 거다.

실제로 내 주변엔 소울메이트와 연인 혹은 가족의 형태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S선배가 대표적이다. S선배는 성욕을 입으로 푸는 사람이다. “저 남자는 성기에 탄력이 없을 것 같아.” “너 요즘 두 남자 성기 양쪽에서 흔들고 다닌다면서?” “네가 그 게르만족 맛을 봐야 그게 얼마나 좋은 줄 알지!” 반복되는 음탕한 직설 화법에 놀라지만 그는 스스로 성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섹스를 안 하니까 입으로 푸는 거지, 얘. 이 나이에 무슨 성욕이니?”

아래에 쓸 에너지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무성욕자 선배가 연애를 한다. 상대는 동성의 소설가 J. 쾌락의 질주와 성적 욕망의 비극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소설가지만 둘의 연애는 플라토닉하다. 아침이면 새벽에 우는 새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문자를 보내고, 동네 빵집에 갓 구운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만나 바게트의 식감에 대해 얘기한다. 서로 자전거 타이어 바람을 채워주고 라이딩을 즐기는 그들은 섹스 없는 연인이다. 그들은 딱 지금 이대로 좋다.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섹스가 아닌 취향의 공유다. 서로 자유연애를 하면서 평생 지적 동반자로 살았던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처럼. 선배와 J는 때때로 J의 서재에서 서로에게 시를 읊고 노래를 하며 종일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연애를 보며 정서적 동반자와 함께 사는 가족의 재구성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이 상실과 결핍의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