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리

화이트 니트 톱 폴앤앨리스(Paul & Alice), 메시 니트 쇼츠 데무(Demoo), 핑크 포인트 스트랩 샌들 지니킴(Jinny Kim).

소설가 김훈의 주인공들은 근사하다. 그들이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면 예외가 없다고 할 만큼, 평범한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 극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실의 보통 남자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비겁하고 졸렬하지 않다. 대신 그들의 맨 밑바닥 정서를 이루는 건 어김없이 허무다. 치유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싶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삶 자체를 꺾거나 지금보다 결코 좋아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통스러운 책임을 다하는 것뿐인 것이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김훈 식의 허무다. 병들어 죽음을 앞둔 아내와 그의 죽음 앞에 선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김훈의 소설 <화장>은 허무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작품을 영화로 만든 건 우리 시대의 거장 임권택이다.

임권택의 <화장>에는 세 남녀가 등장한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암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느라 퍽퍽하고 메마른 삶을 이어가는 중년의 남자, 그 남자와 함께하는 삶이 자신의 병으로 망가졌고,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는 중인 그의 아내, 그리고 그 남자에게 현실의 고통과 도피에의 욕망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존재인 어린 여자가 그들이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남자 오 상무의 내면을 폭발시키는 지뢰 역할을 하는 어린 여자 ‘추은주’를 연기한 건 <하류인생> 이후 두 번째로 임권택 감독과 만난 김규리다. 원작 소설에서 추은주는 생명력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더 이상 오 상무에게 남아 있지 않은 삶의 현현으로 등장하지만, 실제적 관계가 있는 인물이기보다는 오 상무의 상상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추은주는 훨씬 더 구체화되고 중요해진다.

 

김규리

시어한 화이트 롱 드레스 제이어퍼스트로피(J Apostrophe), 빈티지한 골드 펜던트 네크리스소사이어티 오브 골든제이(Society of Golden J).

“처음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는 추은주가 조연이었어요. 분량도 많지 않을 줄 알았죠. 내가 주인공 중 한 명인 줄은 몰랐어요. 매력적이고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비중이 클 줄은 몰랐죠. 시나리오상에도 분량은 많지 않아요. 호정 언니 캐릭터가 워낙 폭발력이 강하잖아요. 추은주는 구체적인 장면보다 이미지로 보여줘야 할 게 많은 캐릭터예요. 글에는 행간이라는 게 있잖아요. 글을 어떻게 현실화하고 영상화할까 하는 게 감독님의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글과 똑같이 가지는 않겠다고 초반부터 생각을 굳히셨던 것 같고. 감독님도 배우들도 오늘이 끝인 것처럼 절벽에 서서 떨어지기 직전인 심정으로 촬영했어요.”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백두 번째 작품이다. 여든을 목전에 둔 대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몇 번째 작품인지보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부터 몇 번째 작품인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국민배우라는 말이 자연스레 통용되게 만든 안성기는 작품에서 늘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동승한 인물을 주로 맡았던 그에게 보통의 남자들을 흔들리게 만드는 일상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갈등을 연기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장>이 상영될 당시, 김호정이 실제로 투병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자신의 경험을 고통스럽게 곱씹었을 그녀의 갈등 역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극의 혼돈과 갈등의 핵인 김규리가 있다.

 

블랙 베어백 롱 드레스 아르케(Arche), 골드 드롭 이어링 란시스케이(Franciskay).

블랙 베어백 롱 드레스 아르케(Arche), 골드 드롭 이어링 란시스케이(Franciskay).

“오 상무의 상상 속 추은주와 현실의 추은주가 뒤섞여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더없이 매혹적이고 예쁜 여자인데,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자책과 자문이 자꾸 생겼죠. 이미지로 가는 신이 많아서 프레임을 낮추다 보니 눈빛 하나, 머리카락 찰랑거리는 순간까지 맞추기가 참 어려웠어요. 나는 정상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감독님은 모니터를 보고 계시니까 왜 이 순간에 웃어야 하는데 못 웃느냐고 하셨어요. 무조건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고 싶었어요. 감독임의 꾸중은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데도 콱 꽂히는 게 있어요. 그게 감독님의 에너지가 아닌가 싶은데, 그 마음에 쏙 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되게 힘들더라고요.”

현실의 추은주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오 상무가 그런 그녀에게 미혹되는 것은 그녀의 젊고 건강한 육체가 자신과 아내가 잃어가고 있는 삶 자체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오 상무의 판타지 속에서 추은주는 점점 피상화되고 미화된다. 그녀는 남자에게 다가오기보다 남자가 다가오게 만드는 눈빛을 가진 여자다. 노골적이고 성적인 유혹을 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손을 뻗어 움켜쥐고 싶은 존재가 오 상무가 상상하는 그녀고, 그것은 생명에 대한 욕망과도 같다. 김규리가 연기해야 하는 인물이 단순히 유부남 홀리는 젊은 여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스스로의 자조적인 소회와 달리 화면 안에서 그녀는 충분히 아름답다. 서늘하면서도 일상의 속도감을 벗어난 시선으로 카메라를 정면에서 응시하는 김규리는 30대 여배우의 가득 찬 여성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김규리

레이스 롱 원피스 딘트(Dint), 오른손의 골드 링 겟미블링(Get Me Bling), 왼손의 골드 링, 더블 링 모두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 & Jewelry).

“첫 촬영 날, 오 상무를 어떻게 매혹하는 거지? 연인인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경계가 모호한 상태였어요. 안성기 선배님이 연기하시는 걸 모니터로 봤어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카메라가 돌아갈 때도 그랬지만,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는 더 매력적이었죠. 이런 남자라면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체적인 사랑, 정신적인 사랑, 존경이 다 사랑이잖아요. 내 감정을 존경으로 잡았어요. 상사에 대한 존경. 아주 밑바닥에는 남녀의 미묘한 감정이 있겠지만, 내 표현은 존경이었던 것 같아요. ”

김규리가 <화장>을 본 것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때가 처음이다. 그러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정작 자신의 연기를 직면할 순 없었다. 거장의 선택을 받았고, 이미 2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지금 김규리를 채우고 있는 질문은 어떤 것인가.

 

모던한 H라인 시스루 슬릿 원피스 데무(Demoo), 오른손의 더블 링 러브캣비쥬(Lovcat Bijoux), 왼손 검지에 낀 실버 링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 & Jewelry), 실버 링 러브캣비쥬(Lovcat Bijoux), 핑크 포인트 스트랩 샌들 지니킴(Jinny Kim).

모던한 H라인 시스루 슬릿 원피스 데무(Demoo), 오른손의 더블 링 러브캣비쥬(Lovcat Bijoux), 왼손 검지에 낀 실버 링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 & Jewelry), 실버 링 러브캣비쥬(Lovcat Bijoux), 핑크 포인트 스트랩 샌들 지니킴(Jinny Kim).

“내가 앞으로 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많이 약해져 있는 것 같아요. 대중과 나 사이에 오해가 있는데, 그 오해는 다 풀리지 않았고 아직도 나한테 화살을 날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파요. 처음에는 내가 살아야 해서 건강하게 버텼죠. 씩씩하게. 노력한 만큼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가 싶고. 중요한 건 작품으로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작품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배우는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해야 할 한 가지가 있으면 그걸 택하니까. 그런데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불행하진 않은데 방황하고 있는 건 맞아요. 내가 나를 대하는 기준이 무너졌달까. 지난 한 해는 그래서 스스로에게 방황해라, 했어요. 내가 아는 나를 버리고 그냥 받아들인 거예요.”

무엇보다 김규리는 열심히 살았다. 작품만 보고 노개런티로 출연한 영화에서는 한겨울에 목숨을 걸고 물속에 뛰어들었고, 온몸에 멍이 가시지 않도록 춤을 췄다. 정글을 헤맸고, 작품이든 사람이든 신뢰가 간다면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섰다. 누군가는 그녀의 방황이 에너지가 소진된 탓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보다는 온전히 연기에 쏟아내야 할 그녀 안의 것들이 충분히 제 곳에 소모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많은 기회, 더 많은 작품을 통해 쓰여야 할 에너지가 지금 김규리 안에 남아 그녀를 힘들게 한다.

 

레몬 컬러 브라톱, 레터링 팬츠, 시스루 롱스커트 모두 자렛(Jarret).

레몬 컬러 브라톱, 레터링 팬츠, 시스루 롱스커트 모두 자렛(Jarret).

“임권택 감독님 큰아들이 저랑 동갑이에요. 오래전부터 뵈어와서 그런지 감독님이 아버지 같아요. <하류인생> 때 감독님한테 모조리 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치열하게 배웠고, 그 감독님이 다시 나를 부르셨다는 게 의미가 컸어요. 우선은 영화 홍보 열심히 하려고요.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부분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한 템포 쉬어가려고 해요. 이제부턴 내가 진심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와 마주친 기분인데, 내가 겪고 있는 방황을 건강하게 마치는 게 지금의 목표예요.”

인생이 견딜 만한 건, 아무도 다음 순간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해도 되는 것은 그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김규리는 누구보다 뜨겁게 오늘을 살아왔고, 그녀는 자신이 품게 된 것들을 남김 없이 펼쳐 보일 순간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문은 늘 그렇게 열렸다. 그녀의 문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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