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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와 연애 사이

작년 이맘때쯤 헤어진 B를 처음 만난 곳은 이태원 클럽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이 놀래요?”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뒤로 확 젖혀야 할 만큼 키가 아주 크고 동굴이 연상되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B에게 끌렸다. 이튿날 아침까지 같이 술을 마시고 우린 곧바로 사귀기로 했다. B는 96년생 스물한 살, 나는 87년생 서른이다. 술이 깨자 아홉 살 차는 너무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이 또한 다 경험이려니 했다. 우리는 주로 그가 다니는 학교 주변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주변엔 온통 파릇한 대학생들뿐. 동전 노래방에도 가고 1만원짜리 안주 무한 리필 술집에도 갔다. B는 귀여웠다. B의 한 달 용돈은 35만원. 직장 생활 3년 차인 내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게 당연했다. 하루는 학교 앞 고깃집의 9천원짜리 돼지갈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인 줄 알던 B를 청담동에 있는 비싼 스테이크 집에 데려갔다. 신세계를 접한 듯 눈이 휘둥그레진 B를 보면서 뿌듯했다. 밤에는 신사동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집에 가려고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데 B가 말했다. “누나, 나 택시비 없어.” 지갑에 있는 5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B 손에 쥐여주고 택시를 잡았다. B가 자연스럽게 먼저 차에 올라탔고 나도 당연한 듯 웃으며 “잘 들어가. 도착하면 카톡 해” 했다. 택시가 눈에서 멀어졌다. 얼마 후 카톡이 왔다. “누나, 나 돈 3만원이나 남았어. 이걸로 내일 또 택시 타도 돼?” 순간 현타가 밀려왔다. 나 혹시 이모 노릇 하고 있는 건가? 이제 막 사춘기 지난 애를 데리고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거 연애야, 육아야? 그날 새벽 B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이자 육아 포기를 선언했다. A, 31세, 여

 

나 아줌마 아니거든!

친한 후배가 다섯 살 어린 남자와 만나보라며 소개팅을 제안했다. 연하남은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가벼운 연애 상대로는 괜찮겠다 싶어 만나보기로 했다. Y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고 그날 이후 우리는 3일 내내 만났다. 4일째 되던 날 그가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1일?” 이 문장을 육성으로 내뱉는 사람이 있다니, 연하는 연하구나 싶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 달간 제법 신나는 연애를 즐겼는데 하루는 Y가 전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 1년쯤 만나다가 헤어졌는데, 계속 연락이 와. 여자친구 생겼다고 했는데도 자꾸 믿을 수 없다고 끈질기게 집 앞에 찾아오고. 이럴 바에 누나가 나랑 한 번 같이 걔를 좀 보면 어때? 깔끔하게 정리되고 좋잖아.” 그날 밤 Y네 동네 카페에서 마주 앉은 그의 전 여친은 Y보다 세 살 어린 스물한 살, 그러니까 나보다 여덟 살 어린 여자였다. 피부가 두부처럼 하얗고, 긴 머리를 땋아 내렸는데 귀엽게 어울렸으며 날씬하고 싱그러웠다. 나는 기가 팍 죽었다. 그래서 짐짓 어른인 체하며 점잖게 말했다. “Y랑 한 달째 만나는 중이야. 이제 Y한테 연락 안 해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나를 향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전 여친이 대답했다. “언니, 나잇값 좀 하세요. 30대는 30대끼리 만나시면 되잖아요. 우리 오빠 군대도 가야 하는데 다녀오면 언니 거의 아줌마 되는 거 아니에요?” 황당해서 손이 떨렸다. 그 와중에 나를 더 열받게 한 건 가운데서 멀뚱히 자몽 주스를 홀짝이며 눈치를 보던 Y였다. 부르르 떨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나는 이후 Y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 우린 그렇게 흐지부지 헤어졌다. 몇 달 후 Y가 예전의 그 어린 여친과 재결합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앞으로 내 연애사에 연하남은 절대 없을 것이다. L, 30세, 여

 

연하라면 못 먹어도 고

나보다 일곱 살 어린, 갓 제대하고 학부 2학년에 복학한 스물다섯 살의 P와 6개월째 연애 중이다. 관계도가 좀 복잡하다. P는 내 사촌동생 O의 동갑내기 친구다. 군대 간 친구가 말년 휴가를 나와 같이 술을 마셨는데 너무 취해 걸을 수가 없으니 차로 데리러 와달라는 사촌동생의 부탁을 받고 찾아간 자리에서 P를 처음 만났다. “O는 잘 들어갔어요? 오늘 죄송했어요, 누나.” 그날의 문자를 시작으로 며칠간 카톡을 주고받고 통화도 했다. “연락하다 보니까 누나가 좋아요. 제대하면 만나 줄래요?” 돌직구에 심쿵했다. 내가 미쳤지 하다가도 P의 제대 날이 자꾸만 기다려졌다. 결국 우린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고민이 더 커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머리는 안 된다고 하는데 마음이 끌렸다. 전전 긍긍하며 연애를 이어가던 어느 날 술기운에 힘입어 P와 모텔에 갔다. 와, 엄청나다. 나는 그날부로 P를 완전한 내 남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까무잡잡하고 단단한 근육에 세 시간을 힘차게 달려도(?) 지친 기색 없는 강하고 섹시한 육체. 그 가운데 보송보송 만져지는 솜털까지. 이러면 어떻고 또 저러면 어떠하리. 나는 그냥 P랑 살련다. 여전히 우리의 관계는 철통 보안 비밀이지만 나는 요즘 생애 가장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대로만 자라다오, 나의 튼튼한 P야. K, 32세, 여

 

22세기 언어능력시험

‘와우내(놀라움의 감탄사)’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 ‘마상(마음의 상처)’ ‘고답이(고구마를 많이 먹은 것 처럼 답답하게 하는 사람)’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H와 3개월 동안 연애하면서 새로 배운 신조어다. 스물두 살의 연하 남친 H는 일터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일찌감치 취업을 포기하고 카페에서 일을 했는데, 1년이 지나 매니저 명찰을 달게 된 날 H가 새 아르바이트생으로 등장했다. 상큼했다. 어쩜 그리 구김살 없이 생긋생긋 잘 웃는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저런 요령을 알려주며 좁은 주방에서 둘이서 복닥거린 지 3개월쯤 됐을 무렵 H가 먼저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둘만의 회식을 즐긴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남친이 된 H는 전화보다 카톡으로 연락하는 편이었는데, 신조어와 준말을 여기저기 자주 갖다 붙였다. 당혹스러웠다. “누나, 진상들 때문에 마음 상하지 마요. 다 사바사야. 우리 복세편살.” 한글 맞는 건가? 내가 모르는 사자성어인가? 며칠 동안 뜻 모를 암호 같은 문자를 해석하느라 애를 먹다가 그에게 하나도 못 알아먹겠으니 전화로 말하라고 화를 냈다. 다툰 다음 날 H가 카페에 출근하자 마자 조용히 무언가를 건넸다. 첫 장부터 빼곡히 신조어와 준말을 풀이해 적은 수첩이었다. 풉. 웃음이 났다. H가 다시 다가와 말했다. “누나, 미안해요. 내가 습관이 돼서. 조심할게요. 혹시 나도 모르게 또 그런 말 쓰면 콕 집어 말해줘요.” 그와 커플이 된 지 3개월째 된 지금, 나는 세상의 모든 신조어를 달달 꿰고 있는 외계어 박사가 됐다. C, 29세,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