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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친구 P가 남자를 만났다. 매일 아침 밥 대신 고구마와 달걀을 먹고 일주일에 세 번은 퇴근 후 무조건 헬스장으로 직행하는 남자다. 주말에 P를 만날 때도 매번 한강이며 청계산이며 산으로 들로 그녀를 끌고 다니는 통에 타고난 저질 체력인 P는 이 남자와의 만남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유유상종이라고 체육이나 운동과 친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우리 친구들 무리는 입을 모아 둘이 얼마 못 갈 거라 예언했다. 하나 의외로 P는 파스 투혼을 발휘하며 그와의 아웃도어 데이트에 혼신을 다했고, 얼마 후부턴 급기야 그가 다니는 헬스장에 등록해 PT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녀가 인스타그램에 ‘#헬스하는여자’ ‘#운동중독’ 따위의 해시태그와 함께 온갖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는 사진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P를 오랜만에 만나니 그녀의 연애 생활에 화제가 자연스럽게 집중됐다. P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진짜 체력이 달려서 만나기 힘들겠다 싶었어. 그래도 말도 잘 통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나름 노력은 했지. 그러다 잠자리를 했는데 신세계인 거야. 허우대가 멀쩡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셔츠를 벗는 순간 숨을 못 쉬겠더라고. 이게 웬 조각상이람. 아니 뭐 체지방이 0%세요? 몸이 너무 좋은 거야. 만날 땐 계속 벗고 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 남자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 미적 만족감이 연애와 섹스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몸짱 남자친구에게 맞추려다 보니 나도 난생처음 헬스장엘 등록했지 뭐야.” 확실히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며 그녀는 연애관은 물론 라이프스타일까지 완전히 바뀐 듯했다.

침대에서 벗은 그의 몸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던 P와는 조금 다르게 친구 L은 운동선수였던 전 남자친구와의 밤을 이렇게 회상했다. “섹스가 걔한테는 마치 40분짜리 인터벌 트레이닝 같았어. 그게 뭐냐고? 헬스 용어인데 말하자면 심장이 뻐렁치게 달리다가 잠시 걷다가 다시 미친 듯이 달리는 식으로 운동의 강약을 반복하는 거야. 혼이 나갈 정도로 피스톤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속도를 낮추고, 잠시 숨 돌린다 싶으면 다시 피치를 올려 정신을 빼놓는 통에 매번 잠자리가 격정 그 자체였지. 사실 40분이 짧은 시간은 아니잖아. 운동하는 사람이라 체력, 지구력이 원체 좋은 건 알겠지만, 그래도 어쩜 그렇게 ‘폭풍 섹스’를 잘하세요?라고 대놓고 물어보니 자긴 인터벌 트레이닝에 익숙해서 그렇대. 침대에서도 그렇게 달리기 40초, 걷기 20초 하는 식으로 시간을 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섹스도 운동이라고 이렇게도 응용이 가능하구나 싶었어.” L은 더불어 평소 체력 단련을 해온 남자는 구사할 수 있는 체위의 한계치가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그녀는 특히 전 남자친구의 ‘다리 찢어 십자 걸기 정상위’ 스킬을 좋아했다는데 이름만 들어도 힘과 유연성을 모두 갖춘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한 체위라는 데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확실히 침대에서는 박력 있는 남자보다 근력 있는 남자가 실속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하나 모든 이들이 근육질 남자와 황홀한 섹스를 한 건 아닌가 보다. 후배 J는 평소 다니던 헬스장에서 한 남자 회원과 친해졌고 몇 번의 데이트 후에 잠을 자게 되었다. 평소 그가 운동하던 걸 보아왔던 터라 자못 화끈한 밤을 기대했다던 J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꼬춘 쿠키’라고 들어보셨어요? 포춘 쿠키에 적힌 운세는 랜덤이잖아요. 남자 거기도 그렇더라고요 어떻게 그 몸에 그 사이즈가 달려 있을 수 있는지, 고추는 복불복이라지만 너무하잖아요. 제 엄지보다 좀 더 길더라고요. 발기한 상태에서요.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에 이래저래 노력해봤는데 솔직히 나중엔 그 탄탄한 몸마저도 지금 나를 기만하는 건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어요. 뭐 어떡해요. 괴롭지만 헤어졌죠.”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함께 듣고 있던 또 다른 후배도 거들었다. “골프 선수인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운동선수니까 당연히 몸은 엄청 좋았어요. 근데 애가 침대에서 뭐랄까, 머리 좋은 거 믿고 공부 안 하는 뺀질이 느낌이랄까요. 별로 열정적인 느낌이 없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람 만나느니 몸은 좀 둔해 보여도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는 남자가 좋더라고요. 사랑을 ‘나눈다’는 표현이 맞는 남자요.” 두 사람과는 맥락이 다르지만 최근 운동에 빠진 남자 친구를 둔 M은 그의 엉덩이는 부쩍 탄탄해졌으나 그게 꼭 좋지만은 않다고 했다. “스쿼트를 얼마나 열심히 자주 하는지, 섹스를 하다 분위기 좀 타려고 하면 자기 허벅지에 근육통이 너무 심해서 오래 못 하겠다나? 아프다고 엄청 징징 대. 물론 본인이 요새 운동을 즐겨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야속하기도 하더라고. 어휴.”

비록 몇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었지만 운동하는 남자와의 섹스가 더 즐거울 수 있다는 속설에 대해선 어느 정도 과학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운동은 교감신경계를 자극하고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돕는데, 이 남성호르몬은 남녀 모두에게 성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그저 웃으면 생기는 줄 알았던 엔도르핀 또한 운동을 할 때도 왕성하게 생겨나므로 운동이 끝날 때 즈음엔 몸은 더 피곤할지 몰라도 기분은 훨씬 개운하고 더 나아가 섹스에 대한 갈망도 짙어진다는 거다. 결국 우리는 호르몬의 노예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식스팩과 화난 허벅지의 야릇한 시각적 이미지에 묻혀 잊고 있었던 뇌의 역할이 상기되며 새삼 선배 K가 떠올랐다. 그녀의 오랜 남자친구는 야근과 야식의 무한 반복으로 둘이 만나는 동안 점차 살이 불었고 잠자리에서도 자신의 터질 듯한 배를 비관하며 종종 섹스 전 불을 꺼주기를 요구했다. 그들의 섹스는 매번 절정에 조급하게 다다랐고 그나마도 거의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결국 헤어짐의 기로에 선 K는 마음을 다잡고 남자친구를 채찍질해 강도 높은 PT와 식이요법을 이겨내도록 도왔고, 반년 후 다이어트에 성공한 남자친구는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십분 발휘해 침대에서도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내가 사람 하나 살렸노라 자조적이지만 흥에 겨워 말하던 그녀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섹스는 고추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로 하는 거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