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 스웨터 닐 바렛(Neil Barrett).

양세종의 눈이 좋다. 멀리서 보면 그저 기분 좋게 생긴 청년이지만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커다란 눈동자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양세종이 앉은 쪽으로 몸이 계속 기울었다. 그는 이야기 꾼이다. 이야기를 잘한다는 건 그 안에 감정이 가득하다는 것. 자신을 괴롭게 할 만큼 매 순간을 독하게 파고드는 그는 질문의 대답조차 최선을 다해 ‘생각’ 했다. 여느 신인 배우의 착하고 예의 바른 대답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최근 종영한 OCN 드라마 <듀얼>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1인 2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것이 그저 운이나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대답들. <듀얼> 이 끝나기 무섭게 양세종은 SBS 월화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 주연인 ‘온정선’을 맡았다. 전작의 캐릭터와 완전히 다른 온정선이 되기 위해 양세종은 걸음걸이, 즐겨 듣는 음악,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꿨다. “연극 한 번 올 릴 때도 몇 개월 동안 그 인물로 살잖아요. 단 몇 주 만에 어떻게 그 인물이 되겠어요?” 양세종은 자신이 운이 좋아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그들이 양세종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톱과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듀얼>에서 1인 2역이었다. 완벽하게 ‘성준’이 됐다가 다시 ‘성훈’을 오가는 일이 힘들었을 것 같다. 초반에 많이 버벅거렸다. 언제 누구를 찍을 지 모르는 상황이라 성준에서 성훈으로 왔다 갔다 하는 포인트가 빨라야 했다. 그래서 초반에 감독님이 시간을 많이 줬다. 그 덕분에 나만의 ‘주문어’를 찾게 되면서 그 지점을 빨리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주문어가 뭔가? 착한 애인 성준이는 억울한 감정이 크다. “나는 진짜 몰라. 아저씨, 나는 진짜 몰라요. 왜 그래요, 아저씨.” ‘왜’라는 의문형을 가지고 계속 되뇌었다. 성훈이는 “너, 내가 꼭 죽인다, 죽이고 만다. 죽일 거야.” 이런 말을 촬영 들어가기 직전에 계속 되뇌었다. 주문어를 계속 외우다가 감독님이 슛 들어간다고 하면 ‘갈게요’라는 말 대신 손을 올려서 사인을 주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서로 이렇게 하자고 말을 맞춘 건 아닌데 감정 신이 많아서인지 각자가 서로의 방식을 알아본 것 같다.

역할이 확정됐을 때 감독에게 부담이 커서 못하겠다고 말했다고. 그때 안 했다면 어땠을까? <듀얼>을 하고 몸으로 배운 게 정말 많다. 특히 정재영 선배님이 제일 감사하다. 이 엄청난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정재영 선배님을 못만났을 테고 나는 아직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겠지. 다른 작품도 <듀얼>에서 얻은 배움으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끝나고 어떻게 지냈나? <듀얼> 모니터링을 계속 했다. 뭔가 허무하잖아. 가족같이 3~4개월을 매일 보던 사람을 못 보고 매일 해온 주문어가 한순간에 끊기니, 섭섭하진 않은데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성훈, 성준의 호흡이 일상생활을 할 때도 배어 나와서 우선은 그걸 털어내는 작업에 집중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야 다음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곧 들어갈 <사랑의 온도>의 정선이가 되기 위해 대본을 읽고 또 읽는 중이다. 어떻게하면 정선이를 내가 잘 구체화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학교 다닐 때는 어땠나? 굉장히 직설적이었다. 지금보다 더 솔직하고 충동적으로 살았다. 싫어하는 사람은 극명하게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더 좋아하고. 솔직함, 진심이 늘 답이라고 생각한다. 버스 탈 돈이 없어도 동기들이랑 맨날 새벽에 모여 옥상에 텐트 쳐놓고 막걸리 마시고 통기타 치면서 밤새우고 그 상태로 아침에 수업 들어가 또 집중해서 열심히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매일 ‘장면 발표’를 15분씩 해야 했는데 동기와 밤새워 그걸 준비하는 시간도 정말 행복했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관심이 아예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끝나면 무조건 책방 가서 만화책을 봤는데 사장님이 너 매일 와서 저녁까지 있을 거면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해서 고1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보니 거기 있는 영화, 만화책, 소설을 다 읽게 됐다. 그만두고 나서도 습관이 남아 매일 영화를 보다 보니 컴퓨터에 저장한 영화가 어느새 5백 편 가까이가 됐다. 마땅히 볼 영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500편 가운데 본 영화를 또 봤다. 볼 때마다 다르거든. 태권도를 오래 했는데 온전한 취미는 매일 밤 영화를 보는 거였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연극을 보러 갔다. 내가 태권도 시범단을 준비했던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환호성 받는 느낌이 짜릿해서였거든. 연극하는 사람들 보니까 대사를 목소리, 행동, 눈빛 등 온몸으로 다 표현하더라. 세종아, 이거다. 그날 집에 가서 곧장 태권도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예종 입시를 준비했다.

그때 보고 또 보던 영화는 무엇이었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위플래쉬>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이 세 편만 반복해서 봤다.

보통 영화를 고를 때 기준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배우 따라간다. 브래들리 쿠퍼가 나오는 영화는 거의 봤다. 매튜 매커너헤이도 좋아해서 거의 다 봤고.

영화만큼 좋아하는 게 와인이라고 들었다. 와인은 요즘 못 마신다. 작품 들어가면 계속 캐릭터를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다. 뭘 하더라도 못다 한 숙제가 있는 것 같아 일상생활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드라마 끝나고 쉬면 좋은 와인을 찾아 떠나겠지.

와인은 어떻게 흥미를 갖게 됐나? 원래는 소주파였는데 대표님 덕분에 와인에 눈을 떴고 시음회도 참여하면서 스스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와인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들과 부산 여행을 갔을 때다. 와인을 마시고 싶은데 늦은 시간이라 문 연 곳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센텀시티에 작은 와인 편집숍이 있다는 정보를 발견하고 찾아갔다. 거기 가서 “이건 뭔가요? 저건 뭔가요?”하고 자꾸 물으니까 사장님이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무슨 장롱 같은 걸 열더라. 가격 책정이 안 되어 있는 와인을 주면서 그냥 싼값에 가져가라고 했다. 부르는 게 값인 좋은 와인이었는데 그대로 사서 바다를 보며 먹었다. 입에 머금는 순간 이미지가 떠오르는 와인은 그게 처음이었다. 영롱한 강가, 초록색 나뭇잎들, 푸른 잔디. 와, 이거다. 알레고리아 말벡이라고, 내 생애 최고의 와인이다. 그 뒤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와인을 찾지는 못했지만 맛이 더 좋은 건 찾았다. 작품 쉴 때는 와인을 찾아다니는 게 정말 좋다. 이어폰 딱 끼고 백화점이든 편집숍이든 가서 “얘는 어때요?”라고 물어보고 다니는 거.

영화나 와인을 뺀 일상은 어떤가? 걷는다. 지금 학동에서 지내는데 학동역에서 시작해 도산공원사거리로 직진해서 청담까지 넘어간 후 골목길로 다시 돌아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보통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걷는다. 배역을 생각할 땐 그 배역이 돼 걸어본다. 그 인물이라면 어떤 템포로 걸을까? 그가 듣는 음악은 뭘까? 작품 들어가기 전에 이 작업을 무조건 한다.

<사랑의 온도>의 온정선은 뭘 좋아하는 것 같나? 정선이는 관계에 따라 많이 바뀌더라. 부모님을 대할 때와 현수(서현진)를 대할 때가 다르다. 부모님을 생각할 땐 조금 다운된 음악을, 현수를 만날 땐 설레는 음악을 고른다. 이걸 왔다 갔다 하면서 듣는다. <듀얼>을 할 때는 완전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이 어두운 음악만 들었다.

예를 들면? 마리아 메나의 ‘Leaving You’, 스탠딩 에그의 ‘Miss You’. 이 두 곡을 반복적으로 들었다.

정선이는 어떤 사람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어떤 분들은 캐릭터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데 나는 사람에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못 하겠다. 기자님이나 나나 완벽하지도 않고 모든 면을 다 가지고 있잖아. 다만 특정 성향이 강한 것뿐이지. 그래서 정선이 성향에 맞는 느낌을 계속 찾고 있다. 사실 평상시 세종이가 좀 다운되어 있다. 다크하고 우울하다. 그걸 깨려고 계속 좋은 음악 듣고 좋은 음식 먹고 상쾌한 향을 많이 쓴다. 원래는 검은 옷을 좋아하는데 나랑 안 어울려도 밝은 옷을 입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당당하고 밝게, 일단 낙천적으로 행동한다.

원래 어두운 성향의 사람이 밝아지려고 노력하려면 에너지 소모가 엄청 날 텐데? 그래서 운동을 더 많이 한다. 러닝 동호회 리더인데 전보다 더 많이 뛰고 근력 운동도 낮은 무게로 많이 한다. 그러니까, 생활 자체를 바꾸고 있다. 내가 온정선이라면? 내가 온정선이라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향을 쓰고 어떻게 사람들을 바라볼 것인가. 내가 온정선이라면 어떻게 걸을까. 내 자세는 어떨까? 이런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배면 정선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선과 주위 사람의 관계만 알면, 그 두 개가 자연스럽게 맞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중요한 타입이다. 일과 일상이 전혀 분리가 안 되는 느낌인데. 전혀 안 된다. 많이 지친다. ‘나 양세종은 어디 갔지?’ 이럴 때가 있다. 세종이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없어지니까. 선배들 가운데에는 일상과 연기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분들이 있다.

세종 씨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다. 안 된다.(웃음) 이미 그렇게 살아와서.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아예 몇 개월 정도 쉬기로 회사와 상의했다. 그게 나에게 맞는 방식인 것 같다.

서현진 배우와 호흡을 맞춘다. 어떤 느낌을 기대하나? 많이 설렐 것 같다. 리딩을 세 번 정도 했는데 그때마다 설레었다. 몸도 떨렸다. 그건 선배님의 힘이다. 그 선배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분명히. 그 느낌을 계속 기억해야지. 그 힘에 빨려 들어가면 될 것 같다.

수트 타임(Time), 셔츠 알렌느(Haleine).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