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농동 커피플레이스 → 종묘 → 세운상가 → 이마 빌딩

나는 구도심의 낙후와 노쇠가 자본과 젊은 피를 만나 세련되고 힙하게 포장된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세월의 구질구질함과 청승맞음이 못 말리게 좋다. 낮은 빌딩의 연식과 골목의 인상을 살피는 동안 호기심이 발동해 발걸음이 더욱 씩씩해지는 종로 구석구석 산책은 내게 활기를 준다. ‘권농동 커피플레이스’에서 베이글과 커피 한 잔으로 간단히 요기한 뒤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서순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서울에 이리 한적한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종묘광장공원의 할아버지 무리를 뒤로하고 종묘 안으로 단숨에 들어선다. 일자로 긴 종묘 정전을 두고 어느 건축가는 ‘빈자의 미학’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하늘만 보고 싶을 때 종묘 생각이 간절해진다. 죽은 왕들에게 발랄한 작별을 고하고 나오면 바로 세운상가가 있다. 종로 보쌈 골목을 지나 1983년에 지어진 이마 빌딩 앞에서 멈춘다. 종로 코아빌딩, 출판문화회관 등 종로구를 산책하다 만난, 좋아하는 빌딩들이 모두 고 홍순인 건축가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일본도 아니고 서울 시내에 자리한 건물 중 이렇게 단정한 맵시와 당당한 자태의 타일 건물은 아마 이마 빌딩밖에 없을 것이다. 정도전의 집터였다가 왕실의 마구간이기도 했다는, 명당의 기운을 품은 이마 빌딩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나 홀로 산책이라면 숲, 공원, 산이 아니라 도시의 내부로 간다. 산책은 내게 사색이나 명상의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를 얻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임나리(온라인 매거진 <포스트 서울> 편집장)

 

카페 커피스트 → 서울시립미술관 → 덕수궁 → 성공회성당

서촌에 살 당시 집 근처 작은 골목들을 벗어나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걷던 코스다. 사직공원 건너편으로 큰길을 건너 성곡미술관 쪽으로 향한다. ‘카페 커피스트’가 나온다. 이곳에서 맛있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부스트 삼아 정동길로 향한다. 뻔한 코스라 해도 나는 정동길이 좋다. 적절한 경사로를 따라 성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이화여고와 예원학교의 오래된 벽돌 건물에 햇빛이 어리는 모습을 구경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정원에 잠깐 앉아 쉬기만 해도 좋다. 다시 덕수궁 돌담을 따라 걷는다. 담벼락이 제법 높은데, 그 위로 궁 안 커다란 벚나무들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멋진 길이다. 물론 사람이 적을 때 얘기지만. 대한문 쪽으로 나오면 못생긴 시청 신청사와 시끄러운 차 소리에 정신이 혼미하다. 덕수궁 앞을 재빨리 지나 비스듬한 골목으로 빠지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곳이 나온다. 중구 정동 3번지, 성공회성당이다. 빛을 머금은 주황색 기와,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한 돌벽, 거기에 한옥 양식을 접목한 독특함까지 이곳의 면면은 나를 사로잡는다. 조선일보 정동별관 앞을 지나 동화 면세점까지 난 짧은 길을 걷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항상 분주한 세종로사거리에서 한 꺼풀만 들어오면 이런 정취가 있는 것이다. 서울은 오래된 도시이며 시간의 레이어가 층층이 쌓여 있다는 점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서울의 예전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걷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김하나(카피라이터, <힘 빼기의 기술> 저자)

 

WxDxH → 카페 오롯 → 서울숲 → 제인 마치 메종

서울숲 인근으로 오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작업실과 집을 옮기면서다. 다들 ‘핫’하다고 말하는 성수동이지만 좁은 골목으로 이뤄진 이 동네가 나에게는 외가가 있던 제기동과 비슷해 왠지 정감이 갔다. 작업을 마무리하는 오후 5~6시경, 퇴근하는 아내를 마중 나가는 길에 몇몇 가게를 둘러보고 사람과 사물, 공간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발길이 향하는 곳은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W×D×H과 ‘카페 오롯’. 두 건물과 가정집을 연결해 특이한 구조를 지닌 카페 오롯은 개발이 비교적 덜 된 뚝섬역 근처라 한적하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나의 오랜 말동무인 친한 형을 만날 수 있다는 것. 1시간가량 수다를 떨다 보면 아내의 퇴근 시간이 된다. 발길을 돌려 서울숲역으로 향한다. 아내는 퇴근 후 서울숲을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주말에는 붐비는 곳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하루하루의 쉼표 같은 장소다. 숲을 크게 한 바퀴 돌면 생각을 멈추고 걷는 데만 집중하게 되는데 종일 작업에 골몰하다 머리를 비우는 개운한 시간이다. 마지막 행선지는 집이지만 옆집인 ‘제인 마치’ 메종에 이따금 들른다. 프랑스 스타일의 소품과 개성 강한 의상이 즐비한 이곳은 나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신비로운 공간이다. 제인 마치 메종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맞은편에서 사무실을 쓰고 있는 주얼리 브랜드 H.R의 디자이너 박혜라 실장까지 대화에 합세하곤 한다. 혼자 때로 둘이 걷는 길이지만 성수동 새촌 산책은 우연히 만나는 다정한 이웃이 빠지면 좀 허전하다. 김진식(가구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