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희

케이프 비뮈에트(Bmuet), 톱 제이어퍼스트로피(J Apostrophe), 이어링 폭스타일(4xtyle).

9월호를 준비하던 작년 여름 배우 안소희를 만난 이후 봄이 오기 직전 그녀를 다시 만났다. 특유의 대화 방식이 좋아서 기억에 오래 남았던 그녀는 지금껏 무수히 만나온 달변가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안소희는 시간이 필요한 인터뷰이이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긴 여백이 있었고,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이 눈빛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심히 골라낸 말들은 윤색 없이 바로 기사로 옮겨도 좋을 만큼 정확한 문장이었다. 민감한 질문에는 양해를 구한 뒤 더 긴 시간 집중하며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애썼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마음이 쓰였다. 조심스러워도 너무 조심스러워서.

열다섯의 나이에 데뷔해서 단숨에 전성기를 누린 소녀. 스스로 재미와 적성을 깨닫기도 전에 ‘국민 여동생’이 됐다. 말이 여동생이지 외모부터 인성까지 평가와 감시의 대상이 되고 세상이 기대하는 여성상의 맞춤 답안이 되어야 하는 여자 아이돌이야말로 대한민국 극한 직업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짓는 표정 하나도 ‘태도 논란’으로 트집 잡히는 살얼음판 같은 세계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 조심스럽기는커녕 세상 겁나지 않는다는 듯 해맑으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안소희

점프수트 클로에(Chloe), 팔찌 랑방(Lanvan).

두 번째 만남이어서 그랬는지 안소희는 이전보다는 조금 가벼워 보였다. ‘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라며 농담도 하고, ‘혼자서 등심도 자주 구워 먹어요’ 같은 20대 특유의 소소한 이야기도 풀어냈다. 한 번은 작아지는 목소리로 ‘저 되게 욕심쟁이예요’라고 말끝을 흐리고는 쑥스러웠는지 ‘파핫’ 웃었다. 그 순간 그녀의 가까운 친구들만 목격했을, 맑고 예쁜 얼굴을 봤다.

올해는 안소희가 데뷔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법 없이 긴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잘해왔다. 배우 안소희는 그간 자신의 연기를 둘러싼 말들에 축축한 변명이나 심경 고백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이다. 세상의 20대가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한 단계씩 거치며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확장해갔으면 좋겠다. 서툴러도 깊이 생각하고 안에서 잘 익혀 꺼내보인 그녀의 정확한 대답들처럼.

 

안소희

원피스 발맹(Balmain), 힐 알도(Aldo), 이어링 폭스타일(4xtyle).

곧 <싱글라이더>가 개봉하네요. 처음 시나리오 받고 단숨에 다 읽었다죠? 극 초반부터 임팩트가 강하거나 복잡한 스토리는 아니에요. 시나리오에도 지문이나 설명이 많지 대사가 많진 않고요. 잔잔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적당한 힘을 유지하다가 후반부에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펼쳐지면서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이병헌과 공효진이라는 조합이 부담스럽지 않았고요? 마냥 기쁘고 설레었어요. 신나는 만큼 걱정도 컸고요. 내가 두 분과 함께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하고요. 근데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 걸 아니까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이병헌이 안소희의 연기에 대해 ‘모든 것을 다 흡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모습이 항상 보였다’고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감사하고 부끄러운데···. 근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웃음) 촬영하면서 이병헌 선배님께 조언을 많이 구했어요. 처음에는 지레 겁먹고 ‘이런 걸 여쭤봐도 되나,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주저하기도 했는데, 내가 연기를 하려면 용기를 내야겠더라고요. 질문하면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짚어주시니까 더 많이 여쭤본 것 같아요. 이것저것 자꾸 물어보니까 그 모습을 보고 ‘쟤가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나 보다, 의지가 있나 보다’하신 것 같아요.

 

안소희

극의 3분의 2를 호주에서 촬영했죠. 낯선 해외에서의 촬영이 어렵진 않았고요? 호주가 배경이어서 이 작품에 더 끌렸거든요. 그룹 활동하면서 미국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연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왜 때때로 낯선 장소에서 더 자유롭고 편해지기도 하잖아요. 3~4월에 찍었는데 호주는 그때가 가을이잖아요. 생각보다 쌀쌀했어요. 하긴 촬영장은 어디든 다 추운 것 같아요.(웃음)

극 중 ‘유진’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머물고 있는 20대 여성이죠. 지난 삶을 비춰봤을 때 평범한 인물을 표현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유진은 호주에서 사기를 당해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재웅’(이병헌)을 만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되는 인물이에요. 제가 평범한 10대를 보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타지에서 생활하며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애쓰는 유진이의 모습은 제가 미국에서 지내던 때에 느낀 감정과 비슷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의 지배적인 감정은 뭔가요? 외로움이죠. 유진이의 경우 두려움보다는 외로움이 컸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고도 한국인인 재웅에게 다시 의지하죠. 미국에 있을 때 저 역시 외로움을 느꼈고요.

<부산행>에 이어 꾸준히 작품을 하고 있어요. 점점 연기에 욕심이 생기나 봐요. 원래 욕심이 많아요. 저 욕심쟁이에요.(웃음) 인터뷰할 때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가장 어려워요. 다 하고 싶어서요.

하고 싶은 역할이 많아도 여성 배우에게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현실이에요. 남자 배우 여럿이 등장하는 ‘브로맨스’ 영화처럼 여자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8명의 여인 들>처럼 각자의 캐릭터가 빛나는 작품이 있다면 고민 없이 할 것 같아요.

 

안소희

원피스 베트멍 바이 무이(Vetements by MUE), 힐 셀린느(Celine).

말수가 없고 표정 변화가 적어서 욕심의 크기를 상상하기 어려워요. ‘하고 싶어 하기는 하나?’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한데저는 호불호가 강해요. 싫으면 안 하는 사람이에요. 연기가 싫었으면 안 했을 거예요.

안소희에게 연기는 괴로움인가요, 즐거움인가요? 즐겁기도 괴롭기도 한데 결국 늘 즐거웠어요. 그래서 계속하는 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로웠다 즐거웠다 반복해요. 촬영 전에는 더 괴롭고요. 확신을 가지고 현장에 가야 하는데,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걱정되는 부분이 많거든요. 내가 맞다고 판단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확신했던 부분이 잘 표현되지 않거나 현장에서 생기는 변수도 있으니 촬영 전 고민하는 시간이 가장 괴롭죠.

괴로움을 직시하는 편이에요? 회피하지는 않아요. 외려 느낀다고 해야 할까요. ‘기분이 우울하니까 밝은 생각을 해야겠다’ 하고 애쓰거나 하지 않아요. 즐거울 때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노력하고,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있으려고 해요. 반면에 화가 날 때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이 화를 몸으로 표현해보겠어’ 하면서 분노의 힘으로 러닝머신 위를 뛰죠. 그러면 ‘이 화를더 잘 느낄 수 있고 살도 빠지겠지’ 하는 거죠. 무리해서 기분 전환을 하려 하는 건 저랑 안 맞는 방식인 것 같아요. 오히려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꾹꾹 느끼고 나면 털어내기가 쉬워요.

욕심은 질투나 후회 같은 어두운 감정을 동반하죠. 하고 싶던 역할을 놓쳤을 때라거나···. 놓쳤다는 건 나에게 왔었는데 당시에 사정상 못 한 작품이라는 거잖아요? 없었어요. (잠시 생각) 아, 아니다. 아니네···.

뭔가 있군요? 사람인지라···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하는데질투나 후회 같은 감정은 아니에요. 내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는 거죠. ‘으이그, 저걸 저 사람이 해서 말이야. 원래 내 건데!’ 이런 건 안 해요.

뒤끝이 없네요. 결정하기까지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 이후부터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온전히 내 결정이었으니까요. 문득 이불킥은 할지언정 후회는 안 하죠.

 

안소희

원피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케이프 제이어퍼스트로피(J Apostrophe), 이어링 프리마돈나(Fleamadonna).

결정과 결과를 온전히 혼자서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또래에 비해 책임감이라는 감정을 너무 빨리, 깊게 깨달은 건 아닌가요? 그죠… 그죠라니!(웃음) 아무래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결정과 결과의 무게를 아니까요.

그 무게가 벅차지는 않고요? 안 그래도 될 부분까지 의식해서 부담을 느끼는 탓에 스스로를 힘들게 한 적도 있어요. 일이니까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요. 힘들 때는 좋은 친구들이 함께해줘요. “책임감이 있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때론 지나치게 과한 것 같다. 일을 빨리 시작했을 뿐이지 아직 스물여섯이잖아” 하고 조언해주고요.

전에 ‘현재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때와 얼마큼 달라져 있나요? 책임감과 부담을 과하게 느낄 때 했던 말 같아요. 지금은 조절하려고 해요. 부담감이 커질수록 사람이 겁쟁이가 되는 것 같아요. 일을 할 때도 행동 하나하나에 지레 겁먹게 되고요. 문제는 그게 일상생활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배우를 계속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와서 다양한 경험을 시도하고 새로운 감정도 느끼며 살아야 하잖아요. 나 안소희로 용감하게 잘 살면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러잖아도 혼자 극장에 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혼자 잘 돌아다니는 편인가 봐요. 헉. 저인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름대로 튀지 않으려고 운동복 차림에 막 이상하게 하고 다니는데 알아보면 큰일이잖아요. ‘쟤가 평소에 저러고 다니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최근 새벽 1시에<라라랜드> 보러 갔었어요. 영화는 혼자 보는 게 편해요.

지금 안소희의 가장 큰 화두는 뭐예요? 이런 건 자랑하고 다니라고 해서··.(웃음) 어제가 데뷔 10주년이었어요. 친구들과 기념 파티를 하기로 해서 일주일 전부터 파티 계획을 짜고 있어요. 어제는 오늘 할 촬영 준비하면서 나름 분주했어요. 기념일에 일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10년 되는 날인데 스케줄이 없었으면 서글펐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 더 즐겁게 촬영한 것 같아요.

쑥스러워하지 말고 여기저기 자랑해요. 10년이라는 시간은 칭찬받아 마땅해요. 그죠?(웃음)

 

안소희 화보

원피스 발렌시아가 바이 무이(Balenciaga by MUE), 이어링 폭스타일(4xtyle).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