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람 김서룡 옴므

러플 장식이 화려한 시폰 셔츠, 은은한 광택이 고급스러운 블레이저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재능이 차고 넘치는 수영 선수가 있다. 그에게는 소주를 병째로 들이켠 다음 날 새벽에도 멀쩡하게 수영 훈련을 나와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도박을 하느라 훈련소 입소 날짜를 무시한 채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아도 거칠 것이 없다. 재능 많은 내가 좀 늦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두려울 것도, 망설일 것도 없는 수영 천재. 정지우 감독의 독립영화 <4등>에서 정가람은 타고난 재능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 믿으며 사는 이 수영 천재를 연기 했다. 작은 영화의 결정적인 역할로 그는 지난해 대종상영화제와 1월에 열린 올해의 영화상에서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오랜만에 새로운 기운을 가진 배우가 등장했다.

 

정가람 코스

오리엔탈 무드의 비비드한 블루 셔츠, 낙낙한 핏의 멋스러운 팬츠 모두 푸시버튼(pushBUTTON), 베이식한 네이비 스니커즈 코스(COS).

배우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르다. 당신의 시작점은 어떤가? 밀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문계열 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때는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일탈이 하고 싶었다. 대학교에 갔는데도 재미가 없더라. 막연히 카메라 앞에 서고 싶었고 여러 인물로 살아볼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에 흥미가 생겼다. 글에서부터 만들어지는 캐릭터와 그걸 표현하는 배우들이 멋졌다. <지구를 지 켜라>의 신하균 선배님을 보면서 연기라는 틀 안에서 배우가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께 6개월이라는 시한을 받았는데 조건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살아갈 것.’ 서울에 올라와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카페나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일하고 일용직 일도 해봤다. 그렇게 돈을 벌어 프로필 사진도 촬영하고 프로필도 돌리고 그랬다.

6개월의 시한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웃음) 아버지 가 굉장히 엄격하고 보수적이다. 아침에도 정해진 시간에 꼭 자리에 앉아야 하는 식의 규칙이 있었다. 연기를 하겠노라 처음 말을 꺼내기가 너무 무서워 떨면서 말씀드렸다. 딱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서울에 올라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 해 혼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셨다. 이제는 두 분 모두 응원해주신다.

<4등>도 오디션으로 만나게 된 작품이겠다. 4차 오 디션까지 봤다. 어쩌면 가장 절실하던 때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오디션에서 자꾸 떨어져 자신감도 그만큼 떨어졌을 때 <4등>에 캐스팅되었다.

<해피엔드> <사랑니> 등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의 작품이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감독님을 만나 영화를 찍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같다. 아직 ‘연기는 이런 것 이다’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대략적인 감은 잡은 듯 싶다. ‘아, 이게 정말 재미있는 일이구나’라고. 카메라 앞에서 뭔가 만들어가는 느낌이 즐거웠다. 나는 어떤 역할이든 이 야기를 채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릭터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만 감독님과 선배 배우들 과 이야기하며 채워가려고 했다. 얼마 전 촬영한 <시인의 사 랑>이란 영화도 그렇게 연기했다. 주인공을 맡은 양익준 선 배님께 많은 것을 배웠다.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은, 그 인 물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이야기를 채우며 이해하려 했다.

<4등>에서 연기한 인물은 수영 천재다. 결국에는 몰 락하지만 내가 연기한 ‘광수’는 한창 잘나가는 때의 ‘광수’다.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정말 잘난 놈. 한번도 천재로 살아본 적 이 없는데 수영 천재를 연기하려니 재미있었다. 내가 살아보 지 못한 인생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연기를 전공하기 위해 올해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이론적인 부분을 공부하고 싶다. 연기를 하기 위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 대략 용어만 들어봤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들을 공부하며 같은 꿈을 꾸는 또래들을 만 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느 배우에게나 신인 시절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가장 불안한 때가 아닐 까? 상반된 두 개의 마음이 공존한다. 굉장히 무서운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다. 어떤 때에는 불안하고 또 어떤 때 에는 엄청 신나고. 과정과 결과 모두 중요하겠지만 일단 지 금은 이것저것 다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하나씩 헤 쳐나가려 한다. 오늘 경험한 화보 촬영처럼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잘해낼 수 있겠지.

불안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건 결국 이 일에 대한 확신이다. 느린 속도일지라도 하나씩 이룰 때마다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무조건 잘될 거라 생각하기보 다는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지 금 당장은 물에 밥 말아 먹고 살 수 있는 만큼만 되면 죽을 때 까지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게 꼭 잘할 수 있으 리라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다. 연기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이 길에 대한 확신이 든다.

신인 배우로 2017년이 어떤 한 해가 되었으면 하나? 지금보다 더 많은 작품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나를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