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여보세요> <미성년>
드라마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배우 이정은

BIFF 이정은

BIFF 이정은

라벤더 색상의 셔츠 드레스 잉크(EENK).

팬입니다. 요즘 어딜 가도 저처럼 팬이라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죠?(웃음) 얼마 전 촬영 때문에 김포 최전방에 갔었거든요. 커피 한 잔 마시려고 다방에 갔는데 거기 주인어른이 절 너무 좋아한다며 본인이 농사지어 직접 만든 도토리묵 가루와 참기름을 주시더라고요. 그 주인 양반이랑 한 시간 떠들었나?(웃음) 연기하는 덕분에 요즘 재미있는 분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요.

<기생충>으로 칸 국제영화제에 다녀온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흥분과 환호가 조금 가라앉은 지금, 배우에게는 무엇이 보이나요? 칸에서 좀 편하게 즐기려고 했어요. 시상식 현장에서도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최대한 안 느끼려고 했고요. 그런 노력 때문인지 다른 배우들보다는 마음이 가벼웠고, 봉 감독님도 나한테 이‘ 작품과 별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보다는 공식 일정이 적기도 했으니 여행지에 온 듯 섬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한데 그건  일종의 거리 두기였던 것 같아요. 나이 드니까 작품으로 얻어지는 것에 대해 한 가지 감정으로 즐거웠다, 슬펐다 크게 흔들릴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지금 이렇게 지나고 보니 확실한 것은 엄청난 행운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거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다 잊어도 나는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내가 왜 거리를 두려고 했을까 곱씹어보면 아마 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연극으로 시작해 30여 년간 연기 생활을 이어온 배우로서 ‘내가 드디어 칸에 왔구나’ 하는 식의 감회는 없었나요? 근데 그게 내가 영화만 쭉 해온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외람되기는 하지만 칸의 위상이나 심지어 아카데미도 실감이 잘 안 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이슈인지를 잘 모르겠고 사실 지금도 잘 몰라요. 이 무지가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 같아. 안 그랬으면 어깨에 뽕이 한참 들어갔을 텐데.

흔히 배우는 다양한 배역을 거치며 성장하고 더 두터워진다고 하죠. <기생충>의 ‘문광’ 역을 통해 덧씌워진 것 혹은 빠져나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문광을 연기하는 동안 우리가 클리셰처럼 사용하고 있는 감정의 바운더리를 못 쓰게 한 것이 굉장히 큰 자극이 됐어요. 실제로 봉 감독님에게 중간중간 “이 사람이 이 상태에서 어떤 해결책을 가지면서 진행될까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 덕분에 어떤 상황에 있는다는 건 결국 어떤 삶과 투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문광은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기 위해서 김 기사도 만나야 하고, 후임 가사도우미에게 사정도 하며 어떤 해결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하잖아요. 그러다가 사람이 주저앉을 수는 있지만 주저앉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사고해야 하니까. 그런 면이 내 삶에도 영향을 주겠죠. 해결하지 못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주저앉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을 때까지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를. <기생충>의 모든 주인공이 그랬던 것 같아요. 뭔가를 찾아가기 위해 무계획이라 할지라도 분투하는 것.

분투하는 ‘문광’도 참 좋아하지만, 저의 ‘원 톱’은 <미성년>에서의 항구 아주머니가…. 아니, 그거를 왜 그렇게들 좋아하시는 거지?(웃음) 나는 그게 이슈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진짜로. 문광은 감독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만들어낸 인물이니까 그게 당연히 이슈가 될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물론 그 파장 역시내 생각보다 더 크기도 했지만요. 그렇지만 <미성년>은 아예 그런 가늠조차 못한 작품이에요. 봉 감독님도 그 영화 보시고 “삥 뜯는 것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이정을 만든 것 같다” 하고.(웃음) 근데 나는 사실 그 역할이 어려웠어요. 행여 비슷한 분이라도 만날까 싶어 방파제를 한참 돌아다닐 정도로요. 내가 잘했다는 생각보다 우스꽝스러웠나? 그로테스크했나?

올해 만난 최고의 악당이랄까요. 하하. 근데 김윤석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는 했어요. 주인공의 만행에 대해서 어떤 보복 행위가 있다면 이런 역할이 해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어이없게 저돌적이다가도 마침내 갈취하고 지폐를 흔들고 갈 때의 그 해사한 표정과 뒷모습…(웃음) 맞아. 전에는 그런 역할을 대부분 남자 배우가 했죠. 여성 악당이 나온 건…. 근데 막상 대사를 하는데 이 사람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화가 확 나더라고. 그러니 반드시 돈을 뜯어야겠다 하고….

그런 면에서 영화 <여보세요>는 동시대, 동년배 여성의 노동과 부양에 대한 책임감, 나아가 통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평소 사회적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배우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고민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매체를 통해 꽤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근데 그거보다는 좀 못하고요. 다만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자라는 세대가 워낙 많으니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번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만 해도 악인들의 이야기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러니 끝까지 봐라, 악인의 최후를.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남들 역시 그럴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만들어줘야죠. 다른 사람들 역시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나만 독점할 수 없죠.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캐릭터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연기해왔습니다.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연기를 놓지 못한 이유가 있나요? 연기는 진짜 잘 안 되니까 재미있는 것 같아요. 부족하니까. 다음에는 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살면서 문득 ‘아, 그때 그 역할을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드니까 또 하게되고. 그리고 나는, 가끔 이렇게 멀리서 현장을 보면 소꿉장난 같아. 사람들이다 미친 거예요. 근데 자기 인생을 살면서 미치는 일에 한번 종사해보는 것도 큰 행운이지 않아요? 인생이 긴 듯 보여도 짧으니까. 그러니까 중독된 거지, 중독. 현장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감정이 오가며 만들어지는 카타르시스가 나를 계속 붙잡아놓은 것 같아.

그렇게 현장을 지키며 작은 비중의 역할도 많이 맡아왔습니다. 중년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속에서 비슷한 설정과 톤의 캐릭터도 있었고요.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부류의 배우일까, 혹은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은 없었나요? 이게 내 자존감일 수도 있는데 나는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가사도우미라 하더라도 전형적으로 풀면 그저 전형성을 가진 도우미겠지만 나는 그 안에서도 살아 있고 싶었어요. 소모되는 역할이라 해도 내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내가 거기 스스로 존재하는 거잖아. 존재를 선택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나름 혼자 꼼지락거리면서 늘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사람들이 그러죠. “너는 연극까지 해놓고 후배들 보는데 가사도우미 역할이냐.” 근데 동요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분명히 바뀔 거야. 내 연기가 살아 있는 순간을 사람들이 알아차릴 거야 하고.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강렬한 알아차림 중 하나가 영화 <변호인>의 아파트 집주인이죠. 한 쪽 눈에만 아이라인을 그린 채 ‘오렌지 쥬시’를 권하던.(웃음) 송강호 배우를 비롯해 모두가 부산 출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역할이요. (이정은 배우의 고향은 서울이다.) 근데 그때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송강호 선배와 부딪치며 연기한다는 건 철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거든요.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투리 배웠고, 정열을 다했어요.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그 역할이 내게 큰 전기가 된 것 같아요.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 배우의 멱살을 잡는 장면조차 혼을 실어서. 봉 감독님이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웃음) 그 현장에 대학로에서 기 세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놨다고 그러는데 나는 그렇게 기 세고, 싸우는 거 잘 못했어요. 얼굴은 착하게 생겼지만 힘 있어 보였나 봐. 나보고 멱살을 잡으라고.

작품 모두 아주 짧은 순간 등장함에도, 그 작은 역할에도 자신을 온전히 담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고 싶은 거죠. 근데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속에 이 역할로 어떻게 다음 기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 순간밖에는 없는 거잖아요. 배우한테는. 그 순간을 재미있어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는 거야.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다다음 역할 같은 것은 지금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게 내게는 좋은 비결이었던 것 같아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 적도 없고, 지금도 없어요. 그건 알아요. 관에 들어갈 거라는 것만 딱 알아요. 거기 투숙자로 예약해놓은 것 외에는 없어.(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저는 이야기가 풍요로워지게 하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어요. 배우 키키 키린을 엄청 좋아해요. 그 사람의 목소리나 풍채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러운 연기, 특유의 정서를 지닌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 외에는 어떤 역할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어차피 살아온 만큼 쌓인 재료가 연기에 쓰일 것이고,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서 금방 나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반대로 역할을 통해 배우죠. 내가 모자라니까 어떤 역이든, 모든 역에서 배우는 게 있어요.

이전까지는 여성 배우가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다양한 여성 서사가 만들 어지고 있다고 보나요? 시도를 하고 있죠. 왜냐하면 한국 영화계는 서구 영화계의 영향을 받고 있고,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야기를 발전시켜야 하겠죠. 근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극을 구성하는 사람과 그 사람들의 관계성에 의해 변하는 거니까, 사람과 관계가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세요. 한쪽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건을 뒤집거나 판을 깨는 역할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힘을 주지 않으면 좋은 이야기는 못 얻게 될 거라 봐요.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인 변화고 그 속에서 단순하게 남자가 했던 역할의 성별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이제 마무리할까요. 연기를 빼면 이정은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나요? 글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이든 많이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집에 가구도 많이 놓고 싶지 않고, 가끔은 옷도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그냥 나는 이렇게 한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그것이 인생 같아. 그런 게 남는 걸까요? 결국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 것. 보존할 수 없다는 것. 근데 아이러니한 거죠. 영화는 기록을 남기는 건데 언젠가 나는 볼 수 없잖아. 누군가는 보겠지만. 나는 사라지지만 그 상황을 즐기고 몰입했던 순간은 남겠죠. 그런 게 남을까요?

무형의 것을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인 거죠? 그렇죠. 내 마음에 남으니까. 바다에 가서도 이러고 (사진을 찍듯 천천히 두 눈을 한 번 깜박인다.) 마음에 남겨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다 담을 수 없다는 결핍에서 오는 갈증도 커지는 것 같아요. 결코 인간은 담아낼 수 없는 것들. 노을은 노을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있는 건데 그 순간을 보고 있으면 아깝죠, 아름답고. 그런 게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아.

화이트 롱 셔츠 드레스와 부츠, 트렌치코트 모두 잉크(EE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