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슈즈 레이첼 콕스(Rachel Cox).

예능 프로그램 <더 로맨스>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배우로서 시나리오를 읽는 것과 직접 쓰는 건 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대본을 읽고 분석하며 연기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했지, 지금껏 어떻게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직접 쓰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영역이었어요. 저는 작가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그런 능력이 없는데 시나리오를 쓰는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될지 주저 했죠.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고, 다행히 재미있어요.

배우로서 배우는 점도 있겠어요. 글로만 접할 때 막연했던 것들이 작가가 어떤 걸 원해서 이런 느낌으로 썼구나 하는 걸 좀더 짐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대본을 읽을 때도 지문을 좀 더 눈여겨보게 됐고요. 어떤 뉘앙스에서 뭘 담고 싶어하는지 생각 하게 돼요. 지금까지 일기나 배우 일지 외에는 써본 적이 없어요. 극화를 목적으로 하는 글은 많이 달라요. 극적인 요소를 더해야 하고 인물 간 갈등도 있어야 하고 위기의 순간도 필요하고. 입장을 달리해서 작품에 참여하는 재미도 컸어요.

어떤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어요? 처음 제작진이 원한 건 연상연하 커플의 로맨스였어요. 그런데 사랑에는 나이 차이라는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나이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갈등을 겪는 얘기에 판타지를 가미해보고 싶었어요. 아직 편집이 끝난 영상은 보지 못했고 프롤로그 영상만 봤어요. (정)제원이랑 쓴 대본이 실제 영상으로 만들어진 걸 보니 누가 연기하고 카메라가 어떻게 담아내고 미술적인 장치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책이나 희곡을 읽는 것과 시나리오를 해석해서 연기하는 건 저마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책을 읽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를 위한 거예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마치 여행을 떠나거나 놀이동산 가는 느낌이랄까요. 희곡은 무대 연기에 대해 알고 싶고 진짜 잘 짜인 플롯이 무엇인지, 좋은 대본은 무엇인 지에 대한 정답이 담긴 교과서를 펼쳐보는 것 같아요. 같은 희곡도 극화되는 과정에서 왜 달라질까, 인물을 분석하는 건 왜 다른 걸까, 이런 질문을 하며 마법 책을 뒤지는 것만 같죠. 배우로서 대본을 읽으면 연기해야 하니까 우선 어깨가 무거워져요.(웃음)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작가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지, 내가 연기하는 인물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집중하게 돼요.

지금껏 읽은 여러 글 중 살아가며 힘이 되는 문장이 있나요? 책 속 문장은 아닌데, 힘들 때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떠올려요. 엄청 힘든 순간도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고,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일 중 한 줌 모래알 정도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요. 너무 힘들어하지만 말고 넘기려고 애쓰죠. 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여러 글이 제 안에서 자연스레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해요.

반소매 셔츠 로우클래식(Low Classic), 톱 레하(Leha), 하이웨이스트 팬츠, 이어 커프 모두 렉토(Recto), 슈즈 레이첼 콕스(Rachel Cox).

반소매 셔츠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올해부터 <강한나의 볼륨을 높여요> DJ로 활동하고 있어요. 라디오는 하면 할수록 정이 들어요. 청취자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다 보니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늘 든든해요. 연기는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 순간의 집중이 필요하고, 그 순간의 진실을 믿어야 하는데 반해 라디오는 호흡이 길죠. 두 시간의 생방송이니까. 그 시간 동안 청취자의 반응을 보고 음악을 듣다 보면 두렵기보다는 편안해져요. 힐링의 시간이죠.

그 두 시간 동안 가장 즐거운 시간은 언제예요? 좋아하는 시간이 정말 많아요. 제 코너 중에 꼽는다면 아, 참 많은데요.(웃음) ‘한나와 두나’라는 1인 2역의 콩트요. 아직 풀지 못한 희극에 대한 제 갈증을 푸는 기분이랄까요. 완전히 절 내려놓고 재미있게 만들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애니메이션 더빙도 해보고 싶어요.

라디오는 사연이나 음악을 듣거나 말을 하는 시간이 있어요. 어떤 때가 가장 즐거운가요? 모두 좋아하는 시간인데 사연과 함께 신청 곡을 틀 때 DJ로서의 임무를 다한다는 생각에 만족감과 쾌감이 느껴져요.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엄청난 기쁨이 있잖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운전 하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제 마음을 알아봐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DJ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제 자신이 채워져요. 직접 보지 않았어도 어딘가에 개나리가 폈다거나 또 어디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거나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주면 하루를 좀 더 활기차게 살아야겠다 싶어요. 전 원래 집에서 쉬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라디오를 시작하고 조금 달라졌어요. 세상엔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분이 많더라고요.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좋은 자극도 돼요. 아, 그리고 저도 늘 같은 곳으로 출근하다 보니 월화수는 어떤 기분이고 목금은 또 어떤 기분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웃음)

활동이 다양해진 만큼 관계의 스펙트럼도 넓어졌겠죠? 촬영 현장에서는 동료들과 고생하다 보면 관계가 끈끈해져요. 말하자면 전우애 같은. 라디오는 청취자들과 정을 차곡차곡 쌓아가요. 오늘 하루 힘들었지, 토닥토닥 이러면서요. 시간이 더할수록 예쁜 마음이 쌓여요. 예능은 촬영 일정이 비교적 불규칙한 편이어서 만날 때마다 새로워요. 예능 프로그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움을 줘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적당한 텐션이 현장에 있어요. 만나면 반갑지만 늘 조금은 낯선 그런 관계죠. 다양한 활동을 하게된 지금이 좋아요. 처음 드라마를 찍을 때만 해도 드라마를 하게 될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러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을 때는 내 성격에 잘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라디오까지 하게 됐어요. 경험이 많아질수록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을 갖게 돼요. 예전에는 해보지 않아 생기는 두려움이 컸어요. 괜히 잘하지도 못하면서 덥석 했다가 잘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요. 이젠 뭐든지 열심히 하다 보면 적응되고 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재킷 로우클래식(Low Classic), 셔츠 렉토(Recto), 데님 팬츠 오피신 제너럴(Officine Generale), 슈즈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화이트 슬립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도전에 망설임 없나 봐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면 안 되지만 집중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도전하려고요. 20대 초·중반에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편이고 안전 추구형이거든요. 이젠 마음이 좀 열렸다고나 할까요. 라디오를 하고 나서 목소리로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연기할 때는 목소리보다 시각적인 것에 눈이 더 많이 가는데 라디오를 하다 보면 제 목소리도 듣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영역도 해보고 싶어요. 가령 읽어주는 책 같은.

20대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어렸을 때는 단점에 대해 생각 하고 그 단점을 고쳐보려고 했어요. 그 단점에 집착하기도 했고. 지금은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아요. 단점에 대해 자꾸 생각 하기보다 저의 좋은 점을 잘 개발해보려고 해요.

반면에 변하고 싶지 않은 점도 있겠죠? 할머니가 되어서도 변하고 싶지 않은 점이 있어요. 초롱초롱한 눈. 눈이 초롱초롱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눈빛이 죽지 않았으면 해요. 제 인생의 목표죠. 세상을 바라볼 때 늘 그런 눈빛이고 싶어요.

배우가 되고 나서 자신의 눈빛이 지쳤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나요? 그보다는 오히려 데뷔 초에 호기심 어린 제 눈빛에서 힘을 빼려고 했어요. 그때는 화보를 촬영해도 좀 강한 컨셉트가 많았어요. 스모키 메이크업을 하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을 낼 수는 없잖아요.(웃음) 강렬한 눈빛을 만들기 위해 제 본연의 모습과 달라져야 했어요. 가족과 지인들이 사진을 보면 저 같지 않다고 할 정도였어요. 말도 안 되게 어둡고 강렬했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스타일링이나 화보 컨셉트 때문이 아니라 제 눈빛 때문이 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 강한나와 연기하는 강한나를 분리했는데 이제는 좀 더 제 눈빛에 가까워지며 편해졌어요.

인간 강한나를 잃을까 봐 두려운 적이 있었나요? 그런 적은 없어요. 작품을 할 때는 배우로 살아가지만 나머지는 인간 강한나의 삶이 중요해요.이 일을 사랑해서 연기하는 거지, 그 관계를 역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래서 스스로 튼튼해지려고 해요. 생각도 건강하게 하고. 보다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하면 마음도 건강해져요. 삼시 세끼 잘 먹고 잘 자고 마음을 다스리며 살고자 해요. 스스로 잘 토닥이며 마음의 소리를 따라.

올해 작품에서는 어떤 강한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자기 주도적이고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나가고 끌어가는 인물에 끌려 요. 언젠가 자신의 삶을 주도하면서 여유로움을 갖춘 인물을 만나고 싶어 요. 딱딱하지 않고 힘을 좀 뺀 그런 역할이요. 좀 더 일상성이 담긴 인물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나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봄이에요. 봄 냄새만 맡아도 설레고 좋아요. 그 시간이 짧아서인지 소중하게 잘 보내고 싶어요. 제 인생의 계절도 지금 봄인 것 같아요, 초봄. 따듯한 기운이 점점 올라와 언 땅이 녹고 전 거기에 씨앗과 모종을 심는 중이에요. 그런 봄이 지난 후 뒤돌아봤을 때 저만의 정원이 펼쳐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씨앗을 심고 있어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