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 마가린핑거스(Margarin Fingers), 링 고이우(Goiu).

김향기

“3년 동안 매년 한 번씩 뭔가를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늘 그냥 좋아서 참여하게 된다.(웃음) 매년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스튜디오 오기 전에 <할리 퀸>을 보고 왔다. ‘할리 퀸’을 비롯해 여러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그들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양한 이야기를 지닌 여성이 힘을 합쳐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모습도 멋있었다. 성별의 구분을 떠나서 저마다 서사가 있고 각자의 행동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 캐릭터에 끌린다. 덩치 큰 남성들과 선이 다르게 표현되는 액션도 멋졌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는 판타지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싸우기 전 긴 머리를 묶는 장면은 현실적이어서 더 재미있었다.”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을 마치고 잠시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요즘 김향기는 열심히 쉬는 중이다. 혼자 극장에 가고 자전거도 타고 운동도 하며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건강한 연기를 하는 건강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몸은 물론이고 멘털도 건강해야 하고. 내 감정이 잘 실린 연기를 잘 담아내려면 그 역할을 받아내는 나 자신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 몸과 마음이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잘 순환할수 있고 회복하는 능력이 좋은 배우가 되려 한다.”

다음 작품에 들어가기까지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향기는 현장에서 많은 선배 배우들과 연기해왔다. “선배들을 보며 편안함에 대해 배운다. 어릴 때부터 촬영 현장에 있었던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벽을 세웠다. 처음엔 그런 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선배들의 따듯함을 느끼며 나도 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선배들이 연기를 재미있어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곤 한다. 그래서 건강하게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연기가 삶의 일부가 된 지금 여전히 새로운 시나리오에 담긴 메시지나 이야기를 보며 빨려 들어가는 기쁨을 느낀다. “명확히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연기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다. 다만 내가 얼마 만큼을 담아낼 수있는 얼굴인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이니 고민만 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F I L M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고.

“저 역시 계속 꿈을 찾고 있어서 그런지이 대사를 보는 순간 저한테 하는 말로 다가왔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결국 예술가들의 이야기잖아요.
대사 자체만 봤을 때는 꿈을 찾아가는 단계에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꿈을 잃어버린 사람의 대사 같기도 했어요.
불행과 행복이라는 감정만으로 본다면 불행의 감정이 더 많이 담겨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요. 예술가의 고충일 수도 있고.”

 

더블 브레스트 슬리브리스 코트 가격미정 지방시(Givenchy), 볼드이어링, 플랫 실버링 모두 1064스튜디오(1064Studio).

진서연

“배우로 산다는 건 기다림의 연속이다. 매번 입시를 치르는 것 같다. 그래도 늘 작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을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는 시간 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배우며 언젠가 연기를 위해 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영화 <독전> 이후 2년의 시간이 지난 후 배우 진서연은 장르물 <본 대로 말하라>로 돌아왔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강력계 수사 팀장. 거친 얼굴을 한 형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현장에서 분장으로 거뭇한 기미와 상처를 만든다. “현장을 뛰는 형사이니 피부가 정돈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예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마음에 닿은 캐릭터 중 남자 배우가 연기한 역할이 많았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 배우에게도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점점 다양한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 같다. 여느 연륜있는 배우들처럼 장르를 넘나들며 범인과 형사, 백수와 사업가까지 다양한 인물을 표현할 기회를 만나 연기하고 싶다. 배우로서 목표이기도 하고.”

연기하지 않는 동안의 진서연은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성적이던 어린 시절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생각나는 대로 쓰긴 하는데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도입부와 엔딩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해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일어 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펼쳐지는 판타지물을 주로 쓴다.” 글을 쓰는 것과 글로 쓰인 인물을 구현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배우는 정답이 없는 일 같다. 해도 해도 계속 못하는 것 같고 처음 같고 답이 보이지 않는다. 연기할 때는 줄곧 칼날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다. 젊은 모습만 남기는 게 아니라 세월에 따라 달라지는 인상, 표정, 주름을 작품에 녹여낼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씩 내가 지닌 한계를 깨가며.”

골드앤 실버 후프링 2만 7천원 앵브룩스(Engbrox).

F I L M <부당거래>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맞춰주다 보면 우리가 일못한다고, 알았어요?

“코미디 장르에 욕심이 있긴 한데 <부당거래>의 대사는 원작과 다른 느낌으로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셔츠와 드레스 모두 푸시버튼(pushBUTTON), 이어링 고이우(Goiu),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주영

“우리는 지금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여성영화, 혹은 여성 감독의 영화라고 굳이 이름 붙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여성 영화인들을 좀 더 일으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겼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말하다 보면 관객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찾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성별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지난해 영화 <야구소녀>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받은 이주영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소녀 ‘수인’을 연기했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도 여자 프로 야구선수가 없는 이 시대에,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꾸는 수인. 영화에서만큼은 수인이 꼭 프로 무대에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나아가 여성들이 부딪히는 사회적인 한계를 조금씩 깨어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처음에는 수인이 무모한 인물로 다가왔다. 30대를 목전에 둔 나도 현실의 벽을 깨부수고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20 대인 내가 10대인 수인을 바라보며 좀 더 쉬운 길을 찾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수인이는 무모한 게 아니라 꿈이 확실한 거였다. 취미로 야구를 하고 싶거나 야구를 가르 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프로 선수가 되고 싶은 것뿐이었다.” 영화 <꿈의 제인> <메기> <야구소녀>까지 10년 가까이 독립영화를 만들어온 이주영에게 독립영화 현장은 자유로움과 패기가 있는 곳이다. 관객 수로만 따지면 작은 팬덤일 수 있지만 그는 이 현장에서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으로서도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외모의 특성을 반영한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 <이태원 클라쓰>의 ‘마현이’는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우선 트랜스젠더의 특징을 익혀야 했다. 내 본래의 특징을 변주해야 하는 인물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남자 배우가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것이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고민도 많았다. 내가 연기하는 것이 과연 맞나. 생물학적으로 처음에는 남성이었는데 이걸 여성인 내가 연기해도 될까. 그러다 여성 배우가 표현해도 새롭겠다 싶었다. 성별에 얽매여 연기하기보다는 마현이라는 인물 자체를 연기하기로 했다. 배우는 기회의 장이 많지 않고 자신의 선택과 연기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동료 배우들을 좀 더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내 선택에 대해서는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좀 더 예민하게 고민하려고 한다.”

F I L M <끝까지 간다>
인간엔 딱 두 가지 유형이 있대.
강자 앞에서 바로 꼬리 내리는 인간, 꼬리가 잘리고 나서야 부랴부랴 애를 쓰는 인간이 있대.
(…중략…) 이광민이 가져와. 이유는 묻지 말고.
궁금한 게많으면 수명이 짧아져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가져와.

“<끝까지 같다>는 제가 좋아하는 장르영화중 한 편이에요.
플롯과 이야기가 단순해요. 두 남자가 쫓고 쫓기는 설정만으로 재미있죠.
그런데 여자 배우 둘이 찍은 그런 영화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떠오르지 않아요.”

 

셔츠와 팬츠 모두 스튜디오 톰보이(Studio Tomboy), 부츠 자라(ZARA),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심달기

“젠더 프리 영상을 늘 동경해왔다. 이전에 참여한 선배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에 감탄하면서 봤는데 올해 이 제안을 받고 며칠간 들떠 있을 만큼 진심으로 영광스러웠다. 평소 젠더 문제에 관심이 많아 흥미롭고 고마운 콘텐츠라고 생각했다.” 심달기는 단편 독립영화 <동아>를 시작으로 <페르소나 -‘키스가 죄’>, <배심원들> 등에 출연했고 얼마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촬영을 마쳤다. “<동아>는 내게 디딤돌이 되어준 작품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을 계속 푹푹 찌르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도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독립영화도 계속 하고 싶다. 아직은 나와 동일시하기 어려운 캐릭터에 잘 녹아들 수 있을지 불안해 나와 닮은 캐릭터에 더 큰매력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처럼 감정 기복이 큰 인물. 나 역시 감정 기복이 큰 편이다. 아직 나 자신을 한마디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많은 감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배우로서 유리한 특징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연극을 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연기가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동경했고, 막연히 언젠가 영화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결과물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끌렸다. 한 영화감독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가르침을 받아 영화인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이런 동경은 배우를 꿈꾸게 했고, 꿈을 힘으로 많은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자보가 붙었다>도 그중 하나다. “성폭력에 반대하는 동아리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다. 그 동아리 안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인데, 자신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인물들을 고발하는 성격의 영화다. 김슬기 감독님과 권기하 감독님이 함께 연출하셨 는데 두 분과 젠더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충분히 고민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갔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도기를 지나는 것 같다. 긍정적인 변화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대한 의식이 소재로만 머무는 작업은 하고 싶지 않다.”

자라(ZARA).

F I L M <연애의 온도>
그러니까 사람들 막 헤어지고 나면 울고불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게 드라마에서나 그러지 실제로 누가 그러냐고요.
난 내가 헤어져보니까 딱 알겠던데?
아, 이게 해방감이구나.
예! 해방이다. 난 자유인이야.

“로맨스 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만의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대사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연애의 온도> 속 이민기 선배의 독백을 선택했어요.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해서요. 이번에 대사를 준비하면서한 번 더 보며 엉엉 울었어요.”

점프슈트 히로인(HEROIN), 링과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백현주

극작가 스카르파와 평론가 볼로디아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2인극 <비평가>에서 백현 주는 볼로디아를 연기했다. 원작에서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는 남성이지만 두 여자 배우가 연기하며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몇 년 사이 연극계에는 성별을 허무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 배우들의 노력도 힘을 보탰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가끔 남자 배역을 리딩했다. 그러던 중 한 후배의 제안으로 목소리를 바꿔가며 남성을 연기하기보다는 여자 작가를 섭외해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극을 만들게 됐다. 여성 작가를 만나 작품을 고민하고,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제작비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낭독극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작품이 지원금을 받고 공연으로 완성되었다.” 이렇듯 변화의 중심에는 여성 배우들이 있었다. 연극계에서는 미투 운동 이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여자 배역을 남자들이 연기했듯이 이제는 남자 배역을 여자들이 연기하기도 한다. 제도적인 변화도 있다. 공연 전에 성교육과 안전 교육을 필수적으로 진행한다.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성별에 따른 한계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다. 영화 예고편을 보노라면 보고 싶지도 않고 연기하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었다. 한국 영화는 한동안 여자 배우들에게 너무 모질었다. “<검사내전>에서는 내가 유일한 여자 수사관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보통 남자 수사관들이 현장에 나가는데, 어느날 감독님이 내게 현장에 나오라고 하셨다. 문득 내가 나가지 않으면 여자 수사관은 현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겠다 싶었다. 내 몫을 잘해내는 수밖에 없다. 여자 연기자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하니까. 가끔 드라마를 하다 보면 성별의 한계 때문에 처음 생각한 대로 캐릭터가 뻗어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 면서도 딱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지쳐 포기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한 질문을 통해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릴 때는 연기가 훈련 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어떤 기술을 익혀가는 일이니까. 매번 죽을 것처럼 신체 훈련을 하면서 언젠가 이 기술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와 다른 소리, 어제와 다른 몸을 만들고 알아가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연기가 재미있는 건 상상하는 즐거움 때문이더라. 깊은 밤 대본을 읽다 보면 내 몸 깊숙이 장기까지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여러 조합이 떠오르기도 하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인물을 찾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작품을 선택하고 싶다.”

F I L M <독전>
그래서요? 제가 누군데요?
전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이번 영상을 준비하며 많은 작품을 두고 고민했다.
처음엔 연극 <비평가>에서 상대 배우가 연기한 스카르파의 대사를 준비했다가 <독전>을 보게 되었다.
영화에 매력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나. 탐나는 캐릭터가 많았다.”

 

재킷과 팬츠 모두 에이치앤엠(H&M), 슬리브리스 톱 자라(ZARA), 실버 네크리스와 레이어링한 반지 모두 르이에(LEYIE), 블랙 앵클부츠 레이첼 콕스(Rachel Cox).

우정원

우정원은 국립극단 시즌 단원과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배신>등 연극계에서 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예전보다 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많이 다양해졌다. 20 대에 연기할 때는 배역이 별로 없어 할머니 역할도 엄청 많이 했다. 30대 초반까지는 늘 극 중에서 울었다. 남편이 죽거나 자식이 죽거나, 그런 와중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인물을 많이 맡았다. 이제는 희곡도 훨씬 다양해지고, 그만큼 역할도 많아졌다. 젠더에 관한 논의가 보다 활발해지면서 많은 여자 배우들이 자신이 맡은 배역을 능동적인 인물로 어떻게 만들 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여전히 많은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남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관객과 시청자도 그런 감성 코드에 익숙하지만 천천히 변화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연극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 우정원은 드라마로 연기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고두심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이 너무 사랑스럽다. 각자의 히스토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소중하고. 사실 여자 배우들은 별다른 서사 없이 역할로만 끝나버릴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지금껏 배우로 살아오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료들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다. 마지막 공연까지 단 3회를 남겨 놓고 임홍식 선생이 자신의 대사를 마치자마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남은 3일의 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 그 공연에 출연한 유순웅 선생님이 밤새 대사를 외워 끝까지 공연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우리는 연습실에 검은 옷을 입고 모여 다시 연습을 했다. 이 얘기는 할 때마다 매번 눈물이 난다. 배우 대부분이 40~50대 언저리였는데 아이 같은 얼굴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로지 연습만 했다. 한 명이라도 무너지면 공연을 마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그 다음날에는 무대에 오르기가 무서웠다. 그 뒤로 연기하는게 무서울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선생님이 끝까지 무대를 마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가 몇 분 뒤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사람보다 무서울 것인가’라고.” 예전에는 욕심이 생기는 배역이 많았는데 이제는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모여 좋은 마음으로 시너지를 얻고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을 하고 싶다. 무대나 촬영을 준비 하면서 만드는 시간이 가장 좋다. 연극의 경우 연출이 디렉션을 하긴 하지만 연출가 역시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모두 혼란 속에 있다가 어떻게든 서로 영향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서로 얼룩을 던지는 것처럼, 그 얼룩이 서로에게 묻어 갈 길을 찾아가는 거다. 그렇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감정을 교류하는 일이 즐겁다.”

셔츠 누마레(Nouvmaree), 이어링 모니카 비나더(Monica Vinader).

F I L M <로렌스 애니웨이>
제가 찾는 건 사람이에요. 저와 같은 언어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버림받은 적 없고 소외되더라도 따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요.

“젠더를 더 이상 남녀로만 구분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로렌스 애니웨이> 속 대사를 고른 건 자비에 돌란 감독을 좋아하기도 하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이자 여자의 영혼을 가졌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복잡한 인물인 로렌스 때문이기도 해요.
영화 속 모든 장면을 좋아하는데 그중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프레드에게 모든 걸 다 떠나
자신을 ‘그냥(Anyway)’ 로렌스라고 불러달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배해선

배해선은 연극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노인 ‘알란’을 연기했다. 이 연극에서는 성별과 상관없이 3명의 배우가 다른 연령대의 알란을 연기한다. “젠더 프리라는 단어가 기획으로 소모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자 배우가 남자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시도지만 그보다는 성별과 상관없이 배우가 역할을 얼마나 자연스 럽게 연기하느냐가 중요하다. 배우에게는 배역이 있을 뿐이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다’라는 말을 언급했다. 우리는 이야기 소재를 충분히 접하고 있고 많은 정보를 공유한 다.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는 한 챕터의 부분을 좀 더 크게 들여다봐야 한다. 성별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할 것이 아니라, 더 공감할 수 있게끔 접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마리끌레르의 젠더 프리 기획이 지향하는 것도 이런 맥락 아닐까.”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5명의 배우가 60명이 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굉장한 무리수로 보이지만 연극이기에 가능했고, 관객 역시 창작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즐겼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연스레 자리 잡은 성별에 대한 선입견이 거부감 없이 허물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랜 시간 무대에서 활동하며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만나왔다고 자평하지만 20대 후반 무렵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다. 많은 무대에서 공연을 이어가다 어느 순 간 지금의 상황에 만족한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작품마다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내 안에서 끄집어내지 못한 것을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더 폭넓은 무언가를 표출하기에는 캐릭터가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작품을 멈추고 워크숍 공연을 다녔다. 고생을 거꾸로 한 셈이다.” 3년 가까이 워크숍 공연을 하며 주어진 텍스트대로 연기하지 않고 대본을 고치기도 하고 때론 가사를 쓰고, 음악감독과 극에 대한 구성도 고민하며 많은 사람과 공동 작업을 했다. “여성 배우로서 느낀 한계를 시작점으로 배우로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스스로 더 많은 것을 보고 진짜배기가 되고 싶었다. 제대로 하기 위해 공력을 쌓았고, 거칠고 힘든 과정과 경험 끝에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갔다.” 물론 여전히 텍스트로 완성된 인물은 서사가 한정적일 수 있다. “그럴 때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찰나를 빛내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억지스럽지 않고. 작가와 감독에게서 좋은 정보를 얻지만 때론 정보가 부족하다. 그럴 때는 텍스트만으로 내가 고민하고 답을 찾아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P L A Y <오이디푸스>
내 발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아, 운명이여, 내 발아.
이제 너는 나를 어디로 인도하려느냐.
신이시여, 이제 모든 것은 이루어졌고, 모든 고통은내 눈앞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당신의 덫에 걸려 고통받는 모습을 보셨으니 이제 만족하십니까?

“오이디푸스의 독백을 거칠거나 묵직한 목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성별에 따른 이미지는 선입견일 뿐이죠. 모든 사람의 성향은 여러 면이 혼재합니다.
오이디푸스를 그저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연기했어요.”

 

박시한 남성 수트 김서룡(Kimseoryong), 포인티드 토 앵클부츠 8 바이 육스(8 by YOOX), 골드와 실버가 레이어링된 링 젬앤페블스(Jem & Pebbles).

이설

<나쁜형사>의 사이코패스 형사와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의 싱어송라이터를 연기한 배우 이설. “젠더 프리 영상을 재미있게 봤고 언젠가 참여해보고 싶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나 <오션스8>도 그렇고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와 <멜로가 체질>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잘 성장 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 더 많은 작품에 존재하면 좋겠다. 얼마 전 본 영화 <작은 아씨들>의 조와 에이미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왜 여자는 항상 사랑이 중요하고 받아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난 그게 너무 싫다. 하지만 난 너무 사랑받고 싶어.’ 이 대사가 특히 그랬 다. 작은 아씨들의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을 잘 하고 좋은 아내가 되어야 했다. 시대에 지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똑똑하게 이겨나가는 조와 에이미 같은 인물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막 필모그래피를 쌓기 시작한 만큼 연기하고 싶은 인물을 떠올리면 수없이 많다. “<미드 90>의 레이와 존나네도 아주 매력적이다. 존나네는 그야말로 악동이고 레이는 동생을 잘 보살피는 형 같은 인물이다. 친구들을 만나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하는데 누군가를 아우를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매일 틀어놓을 만큼 사랑하는 영화인 <굿 윌헌팅>의 윌. 트라우마에 갇힌 윌이 자신을 알아봐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 교수와 여자친구, 친구들을 만나 변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영화와 드라마로 채워지고 있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는 단편영화 <두 개의 방>이란 작품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뒷이야기라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김지영의 상담을 맡은 의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며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여전히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 개의 방>은 이렇게 이해받지 못한 김지영이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남편 몰래 자기만의 방을 구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작품을 만나면 좀 더 주체적인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운 좋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며 흘러가듯 지내고 있지만 나 스스로 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간과하고 있는 문제는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려 한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어낼 수 있는 따듯한 작품을 만나 연기하고 싶다.”

블랙 터틀넥 톱 그레이 양(Grey Yang).

F I L M <비포 선라이즈 >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에 누군가를 만났어, 믿어져?
얘는 말 그대로 보티첼리의 천사야.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얘기해주는 천사 말이야
얘 옆에 앉은 이상한 커플이 말다툼을 하는 바람에 얘가 자릴 옮겨야 했거든.
그런데 내 건너편 옆자리로온 거야. 그렇게 해서 얘기가 시작됐지.
얜 처음엔 날별로 안 좋아했어.
얜 진짜 똑똑하고, 아주 열정적이고.
아름다워.

“<비포 선라이즈>에서 손전화를 매개로 서로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참 재미있었어요.
여행에 대한 로망이 담긴 영화잖아요. 대사 연기로나마 그 로망을 실현해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