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운영하는 헌책방 단골손님 ‘소담’(박소담) 때문에 갑자기 후쿠오카에서 이자카야를 운영 중인 대학 시절의 친구 해‘ 효’(권해효)를 만나러 가게된 ‘제문’(윤제문). 중년이 된 해효와 제문은 대학 시절 둘 다 ‘순이’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끝은 이별과 친구에 대한 미움이었다. 이제 제문은 순이가 좋아하던 헌책방의 주인이 되었고, 해효는 순이의 고향 후쿠오카에서 작은 술집을 하며 살아간다. 28년의 시간이 지난 후 후쿠오카에서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와 난데없이 함께하게 된 소담. 영화 <후쿠오카>에는 윤동주 시인이 옥살이를 하다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기묘한 여행이 담긴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도시 후쿠오카,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 적혀 있는 이자카야 ‘들국화’, 새로운 쓸모를 위한 인연을 기다리는 책들이 모인 헌책방,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사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영화 <후쿠오카>에 이질감 없이 공존한다.

장률 감독님은 보통 이전에 함께한 배우들과 작업했어요. 하지만 권해효 배우는 <후쿠오카>가 함께하는 첫 작품입니다. 장률 권해효 배우와 한 번 해봤기 때문에 이다음 작품부터는 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권해효 그렇죠. 그럼 그때는 이제 두 번째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웃음) 장률 그럴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항상 권해효 배우의 연기를 좋아했습니다. 팬이고. 감독은 항상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배우, 궁금한 배우와 꼭 같이하고 싶지요. 다만 그 마음이 인연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다행히 권해효 배우는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독립영화가 해외 로케이션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촬영이 대부분 일본 후쿠오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일전에 권해효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촬영장 가는 길이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고 하셨죠. 권해효 일단 후쿠오카에서 촬영한다는 점이 참 좋았어요.(웃음) 감독님의 많은 작품을 봐왔지만 한 번도 함께 작업한 적이 없어 갑자기 왜 제게 작품을 제안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제문이와 함께해서 더 좋았어요. 제가 제문이 팬이거든요.

관객으로서 권해효 배우를 봤을 때와 실제 현장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봤을 때 다르게 다가왔나요? 권해효 저 나가 있을까요?(웃음) 장률 아냐 아냐. 나 나쁜 말 하지 않아. 영화 속 권해효 배우는 많이 울었어요. 유독 우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웃는 사람이죠. 실제 웃음과 영화 안에서 우는 모습을 같이 보니까 신비로웠어요.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그때는 제 영화에서도 울게 만들려고 합니다. 평소에도 울게 할 방법이 있을지 찾아보는 중이에요.(웃음)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번 영화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나눈 얘기는 뭔가요? 권해효 촬영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어요. 저는 거의 제문이와 함께 있었는데 대개는 사적인 농담을 주고받았죠. 감독님과 대화를 했다기보다는 주로 제가 관찰당하는 느낌이었어요.(웃음) 그리고 현장이 빠듯하게 돌아갔어요. 열흘 정도의 시간 동안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찍어야 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몇 킬로씩 걸으며 온 배우와 스태프가 카트를 끌며 이동하고 연기했어요. 장률 감독님의 영화는 배우가 어떤 상황을 일찌감치 논리적으로 이해해서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설명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장에 가서 주어진 장면을 열심히
찍으려고 했어요. 배우가 연기 못하면 그건 늘 감독 책임이니까, 잘 못하면 몰아붙이셨겠죠.(웃음) 마음에 안 들면 ‘그거 아니고 이건 좀 이렇게 가보자’ 하는 식으로 말씀하세요. 그 말이 나오기 전에는 절대 먼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웃음) 장률 서로 가만히 있으면서 버티는 겁니다. 권해효 저는 밤 신이 몇 번 없었기 때문에 해만 지면 촬영이 끝났어요. 그러다 보니 늘 힘이 남아돌았죠. 게다가 저는 자전거로 이동했기 때문에 촬영하며 이동하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면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은 다 서둘러 씻고 기절한 듯 잤지만 혼자 자정 너머까지 요리하고 술 마셨어요.(웃음)

경주와 군산에 이어 이번 영화의 배경이자 제목은 후쿠오카입니다. 왜 일본의 다른 도시가 아닌 후쿠오카였나요? 장률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초청받은 것을 인연으로 이 도시를 안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갈 때마다 후쿠오카라는 공간의 매력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다시 가보면 또 모르는 것 같기도 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호기심이 생겼고 궁금했습니다. 후쿠오카를 오가며 친구도 생겼고, 친구가 생기다 보니 그 공간에 제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죠.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모두 오래된 곳입니다. 해효가 운영하는 술집을 비롯해 헌책방 등 모두 오랫동안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가게들이죠. 장률 두 남자가 별로 젊지 않잖습니까!(웃음) 옛날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죠. 젊었을 때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28년이 지나는 동안 그 세월을 내 맘 같지 않게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낸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영화 속 공간들에 옛날 정서가 묻어나야 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될 장소를 선택할 때 그 기준이 바로 원칙이었습니다.

<후쿠오카>에서 해효와 제문은 28년 전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때 이야기를 하며 날을 세우는 걸까요? 권해효 이해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쿠오카>는 ‘왜요?’라는 질문이 불필요한 영화입니다. “거기 왜 가요?” “소담이 걔는 누구예요?” 이런 식의 궁금증은 의미 없어요. 다만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도대체 얼마나 사랑했기에 저러고 살까?’라는 질문을 품었죠. 그리고 사실은 깊게 사랑하지도 못한 것들이 사랑했다고 믿으면서 자기들끼리 스스로를 그런 감정에 몰아넣고 사는 태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애증의 깊이가 자신이 허투루 보내버린 20여 년의 시간에서 나온 것이지 실제로 그 인간에 대한 미움 같은 건 크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얘네들은 반년 정도는 사귀었을까? 아냐, 어쩌면 한 달도 안 됐을지 몰라. 장률 짧을수록 상상의 여지는 많지. 아니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생 그 대상을 생각해요.

앞서 말한 모르는 곳으로 소풍 간 느낌이었다는 건 영화 자체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요? 권해효 이 영화는 사실 관객이 어떻게 볼지가 제일 궁금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편집이 끝났다고 꼭 보여주시겠다고, 보라고 할 때도 안 봤어요. 왜냐면 극장에서 관객과 보고 싶었거든요. 사실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이 어딘가에 있을 법도 하지만 사실은 마치 한 수십 년 전에, 예를 들면 1960년대 후반에 혁명을 꿈꾸던 시절에 사랑을 포기해버린 청년들의 유해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지만 이 인물 자체가 환상일 것 같았죠. 그래서 관객이 이걸 환상으로 받아들일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까, 이런 부분이 궁금했어요.

영화는 분명 현실을 그리지만 극 중 소담은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존재하죠. 장률 해효 씨의 말처럼 어쩌면 영화 속 해효와 제문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대신 그런 정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때문에 28년을 힘들게 산 인물들이 실제로는 없다 하더라도 영화라면 찾아볼 만한 인물인 거죠. 권해효 이 영화를 잘 즐기는 법은 후쿠오카라는 지역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군산은 과거 역사 속에서 일본과 한국 혹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의 중심인 적이 있지만 후쿠오카는 일종의 개항 지역 같은 곳입니다. 많은 것이 섞인 지역이죠. 또 많은 한국 사람이 제일 먼저 도착한 일본 땅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후쿠오카에는 뭔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습니다. 영화의 등장인물인 해효와 제문, 소담도 이 공간에서 전혀 섞일 수 없을 것 같지만 함께 후쿠오카의 길을 걷죠. 이 점이 흥미롭고 관객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지점입니다. 모든 것이 약간씩 어긋나 있는 인물들이지만 함께 있어도 썩 나쁘지 않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윤동주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해효의 가게에도 그의 시가 붙어 있죠. 장률 후쿠오카에 가면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이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돌아가셨죠. 후쿠오카에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살다 보니 어떤 사람은 크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다 아는 시인이 아닙니까. 더구나 해효는 1980년대에 대학생이었고, 윤동주 시인의 정서를 알 만한 인물이죠. 일본에 가서 혼자 살지만 가게에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을 붙여놓은 건 후쿠오카에 제아무리 다양한 사람이 산다 하더라도 주류가 일본인인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해효에게 윤동주 시인의 시가 위로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권해효 지난해 파주출판단지에서 열린 윤동주 시 낭송회에 참여했어요. 그때 오랜만에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있었죠. 새삼 좋은 시라고 느꼈습니다. 감정을 거창하게 드러내지 않죠. 그 시대의 청년이라면 분노해야할 것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자기 안에서 가장 여린 단어로서 솔직하게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기 같은 시를 썼어요. 마치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가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쓴 시 같았습니다. 견디기 위해 쓴 시. 장률 <후쿠오카>로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한 관객이 일어나 윤동주의 시를 낭송한 적도 있어요. 권해효 후쿠오카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 읽는 모임의 규모가 굉장히 크고, 지역별로 있어요. 그분들이 정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부암동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과 시비를 찾곤 하죠. 윤동주의 시를 통해 가해했던 사람들로서 뉘우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일본인이 굉장히 많아요. 외교적으로는 일본과 한국, 중국의 관계가 엉망이라고 하지만, 저 역시 일본과 관련한 시민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이유가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를 위해 애쓰는 양심 있는 일본인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모든 관계를 유지해온 거죠.

불행의 시대에 인간을 구원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힘인 것 같아요. 감독님은 윤동주 시인의 어떤 정서에 마음이 닿았는지 궁금합니다. 장률 윤동주 시인과 저는 고향이 같습니다. 만주 출신이에요. 그 때문인지 그의 시를 보면 항상 내 고향의 공간과 냄새가 떠올라요. ‘명동촌’이라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 마을에 자주 가는데 그곳의 마을 풍경, 논밭, 강 같은 곳이 시처럼 펼쳐집니다. 공간이 주는 정서가 있어요.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감옥 앞에 세우기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죠.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돌아가셨지만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시대에 최고의 반항을 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조선의 언어를 계속 썼고, 그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썼으니까요. 아름다운 언어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권해효 실제로 당시 많은 작가들이 일본어로 시를 쓴 다음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장률 감독님은 영화 일을 늦게 시작하셨죠. 그럼에도 2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변치 않은 감독님만의 세계관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률 추상적인 고민을 하기보다는 작품 하나하나를 할 때 어떤 고민이 생기는가 하는 부분에 집중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오늘 저녁 술이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술 마실 장소와 상대를 떠올리죠. 이런 게 재미있게 이루어질 때 행복하고, 조금 재미없다면 어떻게 행복을 만들어야 할지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게 행복을 위해 어우러지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되는 거라면 나의 나이인 것 같아요. 나는 나이가 들고 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데 영화를 가장 많이 즐기는 관객 층은 청년층이지 않습니까. 그 친구들과 소통이 잘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에요.(웃음) 있는 그대로 내 정서를 얘기할 뿐이고, 이에 동의하면 동의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거죠. 우연히 영화를 하게 됐고, 이제 영화가 습관이 되었어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습관대로 살지 않습니까. 영화는 그런 것 같아요. 권해효 세대 간에 소통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가 맞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 우리 세대가 ‘소통해야지!’ 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다만 룰을 정하면 돼요. 들어주는 일. 서로 다른 세대가 어느 지점까지 꼭 와서 만나 소통하는 건 힘든 일이죠. 이런 소통은 존재하지 않아요. 누가 주류냐에 따라 한쪽이 흡수되든 끌려가든 하겠죠. 이 과정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잘 안 끌려가려고 하잖아요. 그때 완강히 버티려고 하지 마라. 이 정도가 소통인 것 같아요. 힙합? 난 잘 모르겠어. 거기서 끝내야지 싫어하지는 말라는 거죠. 모‘ 르겠어. 내가 즐겨 들을 것 같진 않아’. 이러면 되는데 왜‘ 들어 그거를? 뭔 말인지 알아는 들어?’ 이러면 안 돼요. 장률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살면될 것 같아요. 권해효 맞아. 서로 눈치를 봐요, 괜히.

<후쿠오카>에도 다양한 소통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같은 언어로 대화하지만 소통이 안 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소통하고 교감하기도 하죠. 권해효 그리고 물 위에서는 소통이 안 되는데 물 밑에서는 소통이 되는 것. 그러니까 말로는 모든 게 잘 안 되지만 밑에서는 흐르는 교감들이 있죠. 장률 언어라는 건 소통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소통의 벽이 되는 게 언어예요. 똑같은 한국말을 해도 그게 벽이 될 때가 많아요. 언어는 나의 말투, 서로의 말투를 고수하면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해효 이건 좀 딴 얘긴데 감독님은 사실 요 몇 년 사이에 우리말이 많이 느셨잖아요. 중년의 남성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장률 감독님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아요. 가령 재외 중국 동포나 일본 동포가 한국에 오면 언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커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서 자란 젊은이가 한국어를 서툴게 하면 한국말을 잘한다고 칭찬하지만, 아시아 출신의 동포들은 정확한 문법으로 말해도 어투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차별의 시선을 보내죠. 장률 언어에는 분명 권력관계가 있어요. 예를 들면 세계 어딜 가도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데도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죠. 보통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한테는 계속 한국말로 얘기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당연이 영어를 쓸 거라고 짐작하고 영어를 못하면 왜 이해하지 못하냐는 식이죠.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후쿠오카>가 상영될 때만 해도 오늘의 코로나 시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문화 예술계가 어느 때보다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장률 큰 위기로 다가오지 않다가 영화가 어제 개봉하니 진짜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래도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많은 위기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해효가 후쿠오카에서 운영하는 이자카야 이름이 ‘들국화’예요. 들국화의 노래 ‘아침이 밝아올때까지’를 들으면서 권해효와 술이나 마셔야겠어요. 그러다 보면 다시 새벽이 오겠지요. 권해효 한 가지 분명한 건 코로나 시대라고 언택트, 뉴노멀, 비대면의 일상화를 말하지만 그 방식이 굉장히 제한적이에요. 얼핏 보면 확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제한적이죠. 비대면 방식을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개발하지 못한다고 뒤처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면 방식이 가진 기본적인 가치가 있으니까요. 명화를 제아무리 높은 해상도로 복제한다 할지라도 미술관에서 볼 때와 같은 감동을 느낄 순 없죠.

그러고 보니 부산국제영화제 술자리가 두 분 인연의 시작인 셈이네요. 올해였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요. 장률 부산국제영화제에 고맙게 생각하는 건 술 마시면서 취한 권해효를 만나 캐스팅할 수 있었다는 거? 권해효 그런데 정작 저는 그 술자리가 잘 기억이 안 나요.(웃음) 장률 그 정도로 취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