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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란 단순히 옷 입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1920년대 남녀평등 사상이 등장하자 여자들은 몸의 실루엣을 가려줄 롱 앤 린 스타일을 즐겼고, 1960년대 자유사상이 퍼질 땐 파격적인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젊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담아 티셔츠, 청바지, 운동화로 대변되는 나이를 잊은 놈코어 패션에 심취했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 우리는 왜 할머니 옷장에서 꺼낸 듯 낡고 바랜 옛날 스타일의 옷에 열광하게 된 걸까. 물론 경기 침체로 실질적인 구매 고객의 연령대가 높아졌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현상 저변엔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있다.

복고 패션의 유행 조짐은 지난 2015 S/S 시즌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세린느, 돌체 앤 가바나, 더로우, 카렌 워커 광고 캠페인과 룩북에 은발의 할머니가 등장했고, 그때부터 ‘그래니 시크’라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것. 패션 매거진뿐 아니라 여러 신문에서도 이러한 트렌드에 크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실용적인 패션이 생각보다 오래 패션계를 장악했고, 늘 어린 것에 집중하던 패션 하우스의 이색적인 행보가 모두를 당황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스타일 아이콘이자 작가로 활약한 존 디디온, 1960년대 슈퍼모델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한 린다 로딘, 뉴욕 매거진의 패션 블로그 ‘The Cut’이 선정한 인스타그램 스타 베티 윙클처럼 80세를 넘나드는 옷 잘 입는 할머니들의 패션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니 룩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사랑받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는 단연코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다. 단 두 번의 쇼로 구찌의 역사를 바꾼 그는 고리타분한 ‘범생이’ 스타일의 커다란 안경과 베레모, 스카프, 보 디테일, 플로럴 프린트를 활용해 너드 룩을 탄생시켰고, 성별과 나이의 경계 없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까.

 

이렇듯 너드와 그래니 룩으로 좁혀지는 복고 패션은 이번 S/S 시즌, 다시금 변화의 기로에 선다. 올해의 포인트는 좀 더 하이패션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디테일, 화려한 애플리케이터 장식, 과감한 컬러와 패턴을 기반으로한다. 레트로와 전혀 인연이 없던 여러 패션 브랜드에서도 그래니, 너드, 빈티지라는 키워드를 충족하는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랑방. 섹슈얼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보단 컬러풀한 프린트가 그려진 맥시 원피스, 커다란 보 장식 블라우스, 루스한 시퀸 재킷, 코르사주 초커 등으로 동시대적인 빈티지 패션을 완성한 것. 돌체 앤 가바나의 행보도 이와 다르지 않다. 플라워 패턴이 가미된 파자마 수트와 고풍스러운 꽃무늬 벽지를 옮겨놓은 듯한 재킷과 팬츠가 눈에 띄었고,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여러 가지 테마의 프린트를 과감하게 매치하거나 허리 라인이 높은 플라워 원피스를 디자인해 빈티지 패션의 열풍에 동참했다.

MIU M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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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러한 트렌드의 최전방에 선 디자이너는 미우미우의 미우치아 프라다다. 과감한 컬러 블록과 패턴의 믹스 매치, 레이어드를 무기로 맥시멀리즘의 진가를 보여준 그녀는 러플이 장식된 투명한 오간자 원피스를 레이어드한 독창적인 스타일링과 오버사이즈 액세서리, 헤어밴드, 귀여운 리본 디테일을 적극 활용했고 스트랩 힐과 메리제인 슈즈를 매치해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한 복고풍 패션을 제안했다.

사실 우리는 지난 몇 시즌 동안 잔뜩 힘을 뺀 실용적인 옷 입기에 매진해왔고 청바지와 운동화가 지겨워지려던 찰나, 고맙게도 그래니와 너드 룩처럼 맥시멀한 유행이 새롭게 시작됐다. 빈티지 패션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커다란 이어링이나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거나 부담스럽긴 해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화려한 원색, 할머니표 꽃무늬를 선택하는 정도로 가볍게 시도해도 좋다. 우리는 아직 젊고, 무슨 옷을 입어도 아름다운 청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