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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코어와 애슬레저 스타일이 유행하며 스니커즈는 패션계에 없어서는 안 될 독보적인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와 슈퍼스타처럼 평범한 운동화가 수차례 품절 대란을 일으켰고 하이엔드 브랜드에서도 수십,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초호화 스니커즈를 출시했다. 환골탈태한 스니커즈에 이어 하이패션의 아이콘이 된 또 다른 반전의 주인공은 슬리퍼다. 우리에게 ‘쓰레빠’로 더 익숙한 이 슈즈의 제대로 된 이름은 미끄러지듯 편하게 발을 넣어 신는다는 의미의 슬라이더. 세린느의 피비 필로에 의해 화려하게 패션계에 데뷔했고 헉 소리 날 만큼 비싸지긴 했지만 스타일은 끝내주게 좋은 럭셔리 ‘쓰레빠’로 인기를 끌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슬리퍼의 유행은 이번 시즌에도 계속된다.

 

ACNE STUDIOS

ACNE STUDIOS

아크네 스튜디오와 질샌더처럼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여러 패션 브랜드가 가세했고, 마르니와 프로엔자 스쿨러처럼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녹여낸 슬라이더 형태의 낮은 구두를 선보인 곳도 있다. 지난해 보던 슬라이더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좀 더 하이패션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된 점. 오직 편안함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고급스러운 옷들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날렵한 실루엣이 특징이다. 게다가 한 가지 공통점은 바닥에 딱 붙을 만큼 납작하다는 것. 키튼 힐처럼 살짝 굽이 있는 디자인도 눈에 띄긴 하지만 이번 S/S 시즌, 관심 가져야 할 슬라이더의 포인트는 분명 낮은 굽이다.

슬라이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블로퍼’(블로퍼(bloafer)는 슈즈 뒷면이 없는 백리스(backless)와 로퍼(loafer)를 합친 패션 신조어)를 탄생시킨 구찌의 시도도 무척 흥미롭다. 구찌에 새로운 판타지를 불어 넣은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홀스빗 로퍼를 온전히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가죽의 이음새를 없앤 매끈한 형태와 티베트 염소 털을 풍성하게 매치한 유례없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슈즈 뒷면을 없앤 생경한 로퍼를 제안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 올해는 가죽뿐 아니라 페이즐리 패턴의 실크 소재를 도입하고, 굽에 진주를 세팅하는 등 참신한 아이디어가 보태진 새로운 로퍼를 디자인했다. 이 생소한 로퍼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운데 차려입은 듯하지만 어딘가 무심해 보이는 쿨한 이미지마저 풍겨 특히 젊은 세대에게 뜨거운 지지를 얻고 있다. 동네에서나 신던 슬리퍼를 신고 나왔어도 전혀 기 죽지 않는 일종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나 할까. 또한 빅토리아 베컴은 신발 자체를 구겨 신은 것처럼 디자인한 위트 있는 슈즈를 준비했고, 타미 힐피거에서는 슬리퍼처럼 신고 벗는 뻥 뚫린 스니커즈를, 이둔에서는 실내용 슬리퍼를 꼭 닮은 고풍스러운 태슬 장식 슬리퍼를 제안했다.

VICTORIA BECKHAM

VICTORIA BECKHAM

사실 봄과 여름, 한철 신을 슬리퍼에 수십만원을 투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올해 출시된 고급스러운 슬리퍼엔 조금 마음을 열어도 좋지 않을까. 특히 앞이 막힌 구두 형태의 슬리퍼를 고르면 도회적이면서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매번 바뀌는 것처럼 옷을 입는 방법, 신발을 고르는 기준도 때마다 달라진다. 지금은 입었을 때 편하고 부담 없어 보이는, 여유로운 것들이 각광받는 시대. 날렵하게 각 잡힌 구두와 절대적으로 편안한 ‘쓰레빠’, 그 사이에 있는 슬리퍼가 바로 그 상징적인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