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을 쏘이며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어쩐지 내가 꽤 여유로운 사람처럼 느껴져서 근사하게 생각된다. 누군가 식물을 가꾸는 것은 땅을 가꾸는 일이기 전에 마음을 가꾸는 일이라고 했다.” 위즈덤스타일의 신간 <식물수집가>의 프롤로그 중 한 구절이다. 에디터 역시 몇년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작은 식물을 하나씩 사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정글 같은 오피스 가든을 가꾸고 있다.

 

“1년에 여섯 차례 쇼를 진행하고 핸들링하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완성도 높은 컬렉션을 구현하기는 매우 어려웠어요.” 라프 시몬스는 한 매체의 인터뷰에서 디올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언제나 새로운 이슈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항상 한발 앞선 트렌드와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을 선보여야 하는 패션 월드의 상황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파리에서 열린 에르메스 슈즈 프레젠테이션.

파리에서 열린
에르메스 슈즈 프레젠테이션.

스트레스 지수로 순위를 매기자면 아마도 꽤 상위권에 랭크하지 않을까? 이렇게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힐링법을 찾게 된다. 최근 패션 필드에서 선택한 힐링법이 바로 자연, 그중에서도 식물이다. 꽃과 식물 모티프의 향연이야 스프링 컬렉션에서 늘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라 치더라도, 런웨이를 푸른 초원이나 갈대밭 혹은 꽃이 흐드러진 동산으로 만들어버리는 등 자연을 쇼장에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점점 잦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터. 식물과 녹음을 배경 삼은 광고 비주얼을 마주하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영민한 패션 피플은 스케일을 조금 줄여 자신이 실제 생활하는 공간에 화분이나 식물을 들여놓는 것으로 트렌드에 동참하고 있다.

 

퀸마마마켓의 가드닝 섹션.

퀸마마마켓의 가드닝 섹션.

그렇다면 패션계가 식물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자연을 세련된 콘텐츠로 풀어 내는 ‘베리띵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윤숙경은 이렇게 해석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에 경외감을 갖죠. 하지만 ‘자연’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광범위하고 본질적이다 보니 먼 대자연 대신 가까운 자연, 즉 식물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 같아요. 또한 식물을 하나의 아트피스, 디자인의 산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생겨난 것 도 이런 트렌드가 도래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는 디자이너들이 패브릭만으로 자연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공간 안에 자연을 끌어들여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요.” 사실 자연을 도시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어번 그린 트렌드는 이미 해외에서는 수년 전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삭막한 뉴욕에 조성된 ‘하이라인(High Line)’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물론, 식물로 뒤덮인 파리의 핫한 셀렉트 숍 ‘메르시(Merci)’, 비밀의 정원이 연상되는 밀라노의 ‘10꼬르소 꼬모’ 같은 공간이 주목받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가까운 도쿄만 해도 테노하(TENOHA), 로그로드 다이칸야마(Log Road Daikanyama)처럼 도심 속 그린 라이프를 표방한 복합 라이프스타일 공간이 계속 생겨나며 이러한 열기를 증명하고 있다.

 

이런 트렌드는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패션과 식물을 함께 다루는 ‘모 제인송’을 필두로 스타일리시한 선인장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씨클드로’, 식물 브랜드 ‘슬로우파마씨’, 가드닝 섹션에 과감하게 투자한 ‘퀸마마마켓’ 등이 생겨나며 가드닝이라는 라이프스타일 트렌드가 패션과 접목되기 시작한 것.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본다면 요즘 생겨나는 패션 브랜드 매장이나 셀렉트 숍, 패션 화보나 룩북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린’ 코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멜리사, 아쉬, 에르메스 등 최근 활발하게 열린 패션 브랜드의 2016 S/S 프레젠테이션 현장만 봐도 식물을 도입한 디스플레이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추세. 한남동의 ‘수르기’, ‘앤트러사이트’처럼 요즘 패션 피플이 모여드는 핫 플레이스에도 공통적으로 식물이 존재한다. 실제로 힐링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든, 트렌드에 동참하기 위해서든 어찌 됐건 중요한 건 지금 식물이 가장 핫한 트렌드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