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016 S/S 컬렉션을 끝으로 발렌시아가를 떠난 알렉산더 왕은 화이트로 시작해 화이트로 끝난 레디투웨어 라인을 선보이며 아름다운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 쇼를 기념하는 특별한 무대장치나 이벤트는 없었지만 온통 새하얀 컬러로 물든 컬렉션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전했고, 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뭉클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든 건 아마도 쇼장을 가득 채운 새하얀 옷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발렌시아가 쇼에 등장한 30여 명의 모델은 슬립 드레스와 스포티한 점퍼, 와이드 팬츠, 오프숄더 블라우스처럼 다양한 옷을 입었지만 일체의 컬러와 패턴을 배제한 화이트로 전체를 통일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 시즌 화이트 컬러에 매료된 디자이너는 알렉산더 왕만이 아니다. 컬렉션을 들여다보면 어느 때보다 화이트 컬러의 활약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 물론 화이트는 계절이나 유행과 상관없이 언제나 사랑받는 색이긴 하지만 올봄 주목해야 할 패션 트렌드와 어우러져 기존과 다른 다채로운 매력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지금까지 보던 화이트 패션과의 차이도 분명한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새하얀 컬러로 맞추는 게 포인트. 패턴을 더하거나 어줍잖은 컬러를 보태 화이트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건 절대 금물이란 뜻이다. 오히려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보단 실루엣이나 옷의 디테일, 소재 간의 조화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해 보인다.

일상에서 입기 좋은 화이트 패션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런던의 마가렛 호웰이다. 블랙과 레드, 레몬, 베이지, 화이트라는 오직 다섯 가지 색으로 군더더기 없는 컬렉션을 완성한 그녀는 마린풍의 셔츠와 와이드 칼라로 꾸민 셔츠처럼 살짝 변주를 더한 실용적인 아이템을 내놓았고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심플한 쇼츠, 미디스커트, 크롭츠 팬츠를 함께 매치해 난이도 초급의 화이트 스타일링을 제안했다.

이외에도 여러 디자이너들이 화이트를 주제로 한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전반적으로 화이트 특유의 각 잡힌, 딱딱한 이미지를 덜어줄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대거 등장한 것이 특징이다. 아방가르드한 셰이프가 돋보인 르메르의 셔츠 원피스, 캘빈 클라인 컬렉션의 루스한 맥시 드레스, 랙앤본과 퍼블릭스쿨의 쇼에 등장한 오버사이즈 스타디움 점퍼, 독특한 커팅으로 포인트를 준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의 셔츠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화이트 컬러를 꾸며줄 여러 가지 디테일도 등장했는데 그중 보스와 프로엔자 스쿨러, 질샌더의 쇼에 등장한 프린지 장식이 단연 돋보였다.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화이트 룩에 지나치지 않은 소소한 재미를 더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 외에도 리본과 벨트를 연상케 하는 스트랩 장식을 더한 J.W.앤더슨과 조셉, 마이클 코어스, 벨트와 스니커즈, 투명한 아크릴 뱅글로 캐주얼한 매력을 더한 에르메스의 쇼도 눈여겨볼 만했다.

 

이처럼 화이트 컬러의 담백한 이미지를 살린 여러 디자이너와 다르게 레이스와 시스루, 러플처럼 페미닌한 요소를 적극 활용한 브랜드도 있었다. 먼저 떠오르는 건 클로에와 지암바티스타 발리, 지방시, 에뎀 정도. 특히 이번 시즌 유행하는 자수와 레이스 트렌드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클로에는 에스닉한 페전트 블라우스, 태슬 장식의 롱 앤 린 드레스, 레이스 시스루 셔츠를 입은 소녀를 통해 화이트 컬러가 지닌 궁극의 순수한 이미지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개인적으로 이국적인 원피스와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매치한 클로에의 사랑스러운 보헤미안 룩은 올여름 꼭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기도.

올봄 우리가 입을 옷의 컬러는 화이트와 화이트가 아닌 것으로 구분된다. 이제 막 파마자 차림으로 침대에서 나온 것 같은 슬립 드레스, 어깨와 가슴의 절반 이상을 노출하는 콜드 숄더, 화려하게 수놓은 엠브로이더리 패션. 이 모든 트렌드의 중심엔 눈처럼 새하얀 화이트 컬러가 자리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