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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스타일 다이어리 #01 여배우와의 저녁 식사

배우 문숙은 내게 실체를 모른 채 신화화된 존재였다. 1970년대 천재 이만희 감독의 뮤즈이자 마지막 연인, 어린 나이에 <삼포 가는 길>로 일약 스타가 된 한국의 젤소미나, 그러나 짧았던 배우 생활을 접고 돌연 종적을 감춘 후엔 수십 년간 세간의 관심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배우…. 미디어가 다시 그녀를 찾았을 때 문숙은 하와이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는, 이전과 전혀 다른 낯선 여인이 되어 있었다. 자연과 교감하며 조화롭게 사는 법을 설파하는 이 자연치유 전도사는 이제 이효리도, 한효주도 직접 찾아가 인생을 묻는, 여자들의 롤모델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30대의 어느 날부터 몸도 마음도 이유 없이 아파 방황했던 나 역시 어떤 막연한 돌파구로서 그녀를 동경하고 흠모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한 선배가 문숙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초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쁘고 또 떨렸겠는가. 하지만 한낱 세속의 중생이 득도한 스승을 대면할 때는 자신의 미력하고 미약한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운 법이다. 초야에서 이슬처럼 맑고 투명하게 살아온 그녀가 성스러운 목소리로 비움의 미학을, 살생의 죄악을 이야기하니, 아직 욕심을 다스리는 법을 몰라 혼란스럽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고기 맛을 끊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분을 똑바로 볼 수 있을까.

상쾌한 봄날 저녁, 전망이 아름다운 이태원의 한 식당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나는 맞선이라도 보는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순간 입구 저편에서부터 맑고 환한 기운이 주변을 밝히는 게 느껴졌다. 굉장한 아우라였다. 긴 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아 반 정도는 부스스한 백발, 화장기 하나 없이 말간 얼굴이지만, 오히려 그녀의 타고난 이목구비와 잘생긴 눈썹이 더욱 부각됐다. 발레리나처럼 가벼운 몸에 길고 헐렁한 검은 카디건을 걸쳤는데, 단추가 없는 카디건의 앞섶을 옷핀 몇 개로 대충 여민 것이 인상적이다. 감탄이 나올 만큼 꾸밈없이 아름답다. 얼굴이, 몸매가, 스타일이, 그리고 무엇보다 애티튜드가. 초면의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녀는 말이 많은 것도, 웃음이 헤픈 것도 아니었지만 조용히 있을 때조차 쾌활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 그렇게 뛰어난 미모를 타고났어도, 철저한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도, 완전히 별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게 신기했다.

그날의 대화는 대체로 아주 평범하면서도 정감이 넘쳤다. 그녀는 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은밀한 추억도 편안하게 들려주었고, 돌아온 촬영장에서 느끼는 연기의 고충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아이를 잘 다루는 지혜로운 큰언니처럼 연애 상담도 해주고 모두의 별자리점을 돌아가며 봐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식을 먹을 때의 배려가 감동적이었다. 어떤 음식을 주문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저 치킨도 먹고 생선도 먹어요. 걱정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주문해요” 하고 쿨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다. “비록 제가 채식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걸 여기서 강요하면 식사 자리가 불편해지잖아요. 그래서 밖에서 약속이 있을 때는 원칙에 예외를 둬요.” 아,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속세와 어울릴 줄 아는 금욕주의자를 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진정한 해탈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멋진 저녁이었다.

돌아와서 문득, 나도 텃밭 농사를 짓고, 요가와 명상도 하고, 간결한 식단도 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식사 내내 그 비슷한 얘기조차 없었기에 이런 심경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녀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르치는 뛰어난 선생인 모양이다. 감히, 그녀처럼 자유롭고 멋진 여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