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션계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 시즌이 바뀌고, 새 시즌 컬렉션이 공개됨과 동시에 새로운 트렌드 키워드가 떠오른다는 것. 이는 보통 시퀸이나 스팽글, 레오퍼드나 파이톤 가죽 패턴, 네온이나 뉴트럴 컬러처럼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보아도 눈에 띄는 요소로 구성된다. 찾기 쉽고 알기 쉬운, 그래서 지난 시즌 키워드에 시들해진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패션 인사이더들을 현혹할 수 있을 만한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디테일들이 트렌드 키워드 자리를 차지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된 파워 숄더와 자유롭게 잘라낸 네크라인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워 숄더는 사실 그동안 트렌드를 논할 때 지겹도록 언급해온 단골 소재다. 그러나 강렬하고 매니시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하던 파워 숄더가 새 시즌에는 부드럽게 재해석됐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딱딱하지 않은 소재로 교묘하게 파워 숄더를 창조한 아크네 스튜디오의 블라우스와 펜디의 드레스, 라펠이 시작되는 지점을 한껏 위로 끌어올려 완만한 곡선 형태의 어깨 라인을 구현한 발렌시아가의 코트, 독특한 커팅과 부드럽게 굴린 실루엣으로 언뜻 보면 파워 숄더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인 샤넬의 재킷이 대표적이다.

물론 ‘파워’ 숄더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금 더 힘을 준 사례도 있다. 시퀸 장식으로 화려한 이미지를 극대화한 생 로랑의 마이크로 드레스나 풍성한 시폰 소재로 만든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드레스, 르메르의 감각적인 재킷, 이자벨 마랑의 가죽 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레그 오브 머튼(윗부분은 부풀고 아랫부분은 좁아져 양다리를 연상시키는 소매) 실루엣을 적용해 부피는 크지만 과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특징을 지닌다.

반면 네크라인은 목 부분이 물결처럼 아름답게 파인 보테가 베네타의 드레스가 눈길을 끌며 처음으로 그 존재감을 인정받았고, 목선과 어깨선을 구분 없이 과감하게 도려낸 3.1 필립 림의 톱, 프레임만 남겨두고 벗겨내듯 천을 잘라낸 포츠 1961의 드레스, 뒤집힌 반원형으로 데콜테를 깊게 드러낸 와이 프로젝트의 드레스, 소극적인 비대칭 라인이 돋보이는 알렉산더 왕의 니트 풀오버와 마르코 드 빈센조의 셔츠,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셔츠, 자크뮈스의 드레스 역시 뒤를 따르며 힘을 보탰다.

이 두 가지 트렌드의 등장은 눈에 띄는 스타일을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 특히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화려한 장식이나 요란한 패턴 없이 실루엣과 재단만으로도 충분히 스타일리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활용도 높은 셔츠 하나면 새 시즌을 맞이하는 데 모자람이 없겠지만, 금방 가버릴 유행 아이템 수집에 염증을 느낀다면 집에 있는 평범한 재킷에 어깨 패드를 더하거나 셔츠의 단추를 풀러 한쪽만 젖히는 스타일링만으로도 트렌드 세터 대열에 동참할 수 있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