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보기 좋은 옷이라도 추운 날씨 앞에선 따뜻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각종 최상급 퍼로 완성한 코트, 가벼운 충전재를 가득 채운 퍼퍼 점퍼 등 고급스러움과 첨단 기술력을 앞세운 여러 방한 아이템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건 ‘이 물건을 어떻게,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많은 브랜드에서 겨울옷을 만들 때 퍼 소재 퇴출을 선언하거나 친환경 충전재를 사용하는 등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주목받는 소재가 바로 플리스다. 표면에 파일이 일어나도록 만든 가볍고 따뜻한 직물 또는 편물을 가리키는 플리스. 한마디로 마치 양모처럼 복슬복슬한 촉감으로 보온성을 높인 합성 원단이다. 1980년대 미국의 말덴 밀즈사가 개발했고,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에서 이를 아웃도어 아이템에 적용해 유명해진 것. 1994년 탄생한 파타고니아의 ‘Retro-x’는 겉감과 안감 사이에 방풍, 투습 기능을 지닌 P.E.F(Performance Enhancing Film) 소재를 삽입하고, 1998년 왼쪽 가슴 부분에 주머니를 배치해 지금까지 사랑받는 아이코닉한 디자인으로 진화했다. 샤넬의 트위드 재킷이 여러 디자이너에게 큰 영감을 주어 지금까지 꾸준하게 재해석되듯 다양한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Retro-x도 쉽게 볼 수 있다. 동시대적 감각을 느끼고 싶다면 뉴욕의 신진 디자이너 샌디 리앙을 눈여겨볼 것. “패션이 너무 심각할 필요 없잖아요?” 샌디 리앙은 이런 장난스러운 패션 철학을 담은 플리스 재킷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사랑스러운 파스텔컬러, 과감한 레오퍼드 패턴을 더한 키치한 플리스 재킷이 대히트를 치며, 그녀의 시그니처가 된 것. 2019 F/W 컬렉션에서도 3.1 필립 림, 코치 1941 등 여러 브랜드에서 Retro-x가 연상되는 주머니와 지퍼 장식을 더한 플리스 재킷을 런웨이에 올려 눈길을 끌었다. 샤넬과 더 로우는 플리스가 연상되는 니트 아이템을 선보이기도 했다.

플리스는 보온성이나 심미성을 너머, 앞서 언급한 ‘지속 가능한 패션’을 구현할 수 있는 소재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파타고니아는 재활용 소재나 천연 섬유를 이용한 새로운 에코 플리스를 매년 선보이고 있고, 이를 통해 내구성을 높여 물건이 오래도록 가치를 잃지 않게 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노스페이스, 블랙야크 등 여러 아웃도어 브랜드 역시 이러한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반갑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어떤 옷을 눈여겨보고 있는가? 어떤 가치에 돈을 지불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