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466810

대꾸 없는 ‘읽씹’

헤어지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이건 악담보다 더 지독한 악담이다. 안다, 알고 있다! 헤어지자는 말을 ‘카톡’으로 하는 남자는 ‘찌질’하다는 것을. 대학 졸업 후에도 꾸준히 연락하는 같은 과 후배였다. 대화가 잘 통하는 여자였다. 왜 여자들이 커피를 3시간 동안 마시는지 이해가 됐다. 이 호감이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 채 그녀와 사귀었다. 그런데 스킨십이 문제였다. 그녀를 만지고 입 맞추는 내가 어색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진도가 안 나갔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결국 헤어지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사과하고 싶었다. 뭔가 잘못된 걸 깨달은 순간 동창들 사이에서 나는 상종 못할 나쁜 놈이 돼 있었다. _선박회사 영업팀 L 대리

20151004161940_lKTBPKpxaf

모든 직장에서 3개월을 채 못 버티는 의지 박약의 남자였다. 그와의 미래가 염려된다기보다 매번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게 벅찼다. 그날도 모텔비 때문에 싸웠다. 헤어지자는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붙잡아도 내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참 말이 없었다. 긴 정적 후, 그는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사실 나 네 친구 L이랑 잤어. 네 생일 날.” 지난 생일, 만취한 나를 집에 보낸 뒤의 정황을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그 이후로도 못 참고 몇 번을 더 만났다고, 최근에야 겨우 관계를 정리했노라고, 끊기 힘든 여자였다는 안 해도 될 소리까지 했다. 나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는 말을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내뱉었다. 이별의 순간에 들은 고해성사. 어쩌면 이날을 위해 벼려둔 칼처럼 느낀 건 기분 탓일까. 근데 너희 모텔비는 누가 냈니? _공연기획사 마케팅 팀 P대리

“너 진짜 못생기고 또라이인 거 알지?”

다섯 살 연상의 그녀와 만나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누님은 잘 계시냐’며 은근히 비아냥거렸다. 누군가는 그녀의 가임 여부를 대신 걱정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20대 여자들은 절대 감내하지 못할 내 변덕과 짜증을 묵묵히 받아내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종종 내 얼굴을 움켜쥐고, “어구구, 우리 못난이 인형” “자기의 자유분방함이 좋아. 예술가의 피가 흘러, 남달라!” 하며 나를 북돋아주었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 도중에 “그럼 헤어져”라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해버렸고 아니다 싶어 사과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근데… 너 진짜 못생기고 또라이인 거 알지? 꼭 기억해라.” 더 이상 ‘사차원 못난이’라고 사랑스럽게 속삭이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나는 이제 그냥 못생긴 미친 놈인 거다. 분이 안 풀렸는지 “내 친구가 너 보고 역겹대” 라는 앞뒤 없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학원생 M

20151004161907_jaurWzIMoX

6년의 연애가 끝났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비가 오면 으레 가는 국숫집이 있었고, 저녁이면 ‘치킨에는 소주지!’를 외쳤다. 사소한 입맛과 취향은 물론 서로의 부모님 생신을 기억하고 챙겼다. 그 익숙함이 진저리 났다. 친구들의 풋풋한 연애를 훔쳐보며 내 청춘에 미안해졌다.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이 남자의 첫사랑이다. 누구보다 한결같이 나에게 충실한 남자였기에 당연히 붙잡을 줄 알았다. 죽겠다고 자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그런데 웬걸 그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러더니 침착하게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결국 넌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했다. 그의 서늘한 표정에서 저승사자를 봤다. 그 남자의 예언은 적중했다. 만취한 날이면 늘 그를 찾았다. 그렇게 두 번을 더 사귀고, 헤어진 뒤에야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매거진 에디터 P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다”

상하 관계가 명확한 건설회사에서 팀내 유일한 여성이었지만 남자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부장의 진두지휘 아래 밤마다 회식을, 토요일에는 등산을 했다. 친구들은 “매일 만나면 정분 나지 않나?” 하고 물었지만 이곳에서 사내 연애는 입에 담아서도 안 될 금기어였다. 2년 기수 위인 내 사수는 야망의 남자였다. 그는 부장과 매일 출퇴근을 함께 했다. 아현동에 살면서 새벽 6시 반에 이촌동으로 부장을 픽업하러 가야 하는 기이한 ‘카풀’이었다. ‘저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할까?’에서 시작된 연민이 결국 사랑이 됐다. 당연히 비밀로. 매사에 조심스러운 그 덕분에 10개월을 만났어도 사내 사람 누구도 몰랐다. 그런데 부장이 우리의 연애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를 불러냈고, 부장과의 ‘면담’을 마친 그는 10분 만에 문자 하나를 보냈다. “그만 만나자,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다”. 건설회사 홍보 팀 J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