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비텡(Marina Bitten) 여성 인권 운동을 펼치는 페미니스트,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마리나 비텡(Marina Bitten) 여성 인권 운동을 펼치는 페미니스트,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낯선 나라로 떠나 생경한 풍경을 마주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도 있고, 가끔은 홀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보내는 시간에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 우연히 만난 여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한참 동안 서로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알게 된 여자들과 보낸 시간은 스물여덟 살의 젊은 사진가 루이자 도흐(Luisa Dorr)에게 특별한 영감이 됐다. 작가는 마치 자연의 모습이 기후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여자의 얼굴 또한 저마다 지나온 세월과 삶, 생각과 고민의 흔적에 따라 달라진다고 느낀다. 루이자 도흐가 인도, 중국, 아르메니아, 영국, 노르웨이, 스페인, 페루 등 여러 나라에서 머무는 동안 만난 여자들의 인물 사진으로 구성한 작품 시리즈 ‘#WomanTopography’에는 총 35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작품 속 피사체가 된 그녀들이 카메라 앞에 앉아 털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 살아가는 평범한 순간들이다. 어떤 여성은 평화롭고 따뜻한 오늘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여성은 끔찍하고 잔혹한 어제의 기억을 전하기도 한다. 루이자 도흐의 사진에는 그렇게 다양한 여성의 얼굴에 스며든 삶의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

‘#WomanTopography’는 어떻게 시작된 작업인가? 여행 중 마주친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모든 이들의 얼굴과 표정에서 그들이 겪은 시간과 감정, 그리고 각자 속한 문화와 지역의 특징 등 다양한 것이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특히 여성의 얼굴에 남은 삶의 흔적과 기억에 흥미를 느꼈다. 이 시리즈의 시작은 2년 전 인도에서 열리는 사진 예술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여성을 찍은 것이다.

이전에 선보인 작품과 달리, 이번 시리즈는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작업한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진행하는 작업이라, 여성들이 커다란 카메라 앞에 서길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존재를 최대한 배제해야 더욱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서 SNS에 작품을 공개했고, 그를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도 많다.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인연을 쌓는 것과 SNS에서 알게 된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것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시리즈의 타이틀에는 해시태그를 붙였다. 언제 어디서든 작품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시리즈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모든 여성이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다른 시간을 겪으며 추억을 쌓고, 평범한 삶 속에서도 늘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남성 위주의 문화가 남아 있다. 하지만 현대 여성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와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왔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단단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여성들의 용기와 의지를 응원하고 싶다.

안드레아 트레헤아르(Andrea Tregear) 아크릴 물감을 주로 쓰는 디자이너, 페루 바랑코

안드레아 트레헤아르(Andrea Tregear) 아크릴 물감을 주로 쓰는 디자이너, 페루 바랑코

사진 속 여성들의 분위기, 표정, 눈빛, 포즈가 모두 제각각 다르다는 점이 독특하다. 내가 만난 여성들이 속한 문화와 지역, 쓰는 언어, 직업과 라이프 스타일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아티스트부터 어린 학생, 화려한 패션모델, 도시를 떠나 숲으로 향한 젊은 자연주의자, 건축가, 페미니스트, 사업가, 철학자, 댄서, 요리사까지 다양하다.

여자들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촬영을 진행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여성들에게 촬영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선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서 속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려 강요하거나, 작업을 진행하려 조급해하지 않는다. 같은 여자인 내게 어느 정도 신뢰를 느낄 때까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나의 생각과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취미, 가족, 일, 과거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까지 나누게 된다. 이렇게 섬세한 교감이 이루어질 때쯤 촬영을 시작한다.

사진 작업을 제안했을 때 선뜻 응하지 못하고 망설인 여성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직 거절한 사람은 없다. 작업 이전에 그 여성과 내가 나누는 우정과 진심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여성 중 한 명인 마리암(Mariam)을 담는 작업은 아르메니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진행했다. 철학자인 그녀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대화를 이어가기도, 촬영을 제안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조용히 산책하는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점 또한 인상적이다. 촬영 장소는 항상 피사체가 되어줄 여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정한다. 그녀의 집, 자주 가는 카페, 늘 지나는 거리, 힘들 때마다 찾는 공원, 친한 이웃의 집, 그녀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간다.

작품 속 여성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찾은 곳 중 가장 마음에 든 곳은 어디인가? 스페인 남부에서 만난 알리시아(Alicia)가 사는 곳. 사진 속 공간은 그녀의 정원이다. 스페인의 대도시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살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살던 곳을 떠나 인구가 약 1천 명밖에 되지 않는 남부의 작은 마을 실레스(Siles)로 향했다. 그리고 실레스에 자리 잡는 동시에 모든 커뮤니티와 관계를 끊었다. 직접 농작물을 재배해 자급자족하며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깊은 숲 속에 있는 집이라 가까운 이웃도 없다. 알리시아는 햇빛이 따뜻한 날이면 사진에서 보듯 발가벗은 채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이는 모두 알리시아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나는 그녀의 평화로운 숲 속 집이 마음에 꼭 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새로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브라질의 한 지방을 여행하다 만난 마리나(Marina)의 이야기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는 페미니스트였는데, 촬영을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무척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촬영 전날 밤, 길을 걷다가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광경을 마주쳤고 마리나는 피해 여성을 돕기 위해 나섰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을 부르려 했지만, 아내는 익숙한 듯 조용히 남편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브라질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과 차별에 피해를 입고도 대응하지 않는다. 마리나는 이런 현실에 분노하고 슬퍼한다. 그녀가 겪은 이 사건은 여성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의 소재로 삼는 내게 강한 자극이 됐다.

사진들을 쭉 살펴보고 있자면 다음엔 또 어떤 여행지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어디로 향할지는 정해뒀다. 지난 여행지인 페루에 이어 올해 7월에는 에콰도르로 떠난다. 갈라파고스제도까지 다녀올 생각이다. 올 한 해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을 돌아보려 한다. 내년에는 아시아에 다녀오고 싶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유럽이나 미국과 전혀 다른 이색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기대된다. 내가 앞으로 찾아갈 여행지에서 어떤 여성들을 어느 길 위에서 만나게 될지는 모른다. 피사체가 될 여성을 정하는 데는 특별한 기준이 없다.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에 따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제한 없이 자유롭게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낯선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늘 새롭고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