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mcmacumk14_01정유정이라는 이름은 ‘재미’와 통한다. 장동건, 고경표, 송새벽 주연의 영화로 제작 중인 <7년의 밤>은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책으로 이름나, 2011년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힌 소설이 되었다. 그녀의 신작 <종의 기원>은 지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과 나아가 유영철 사건 이래로 널리 쓰이게 된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의 차가움을 직접 연상시킨다. <7년의 밤>이 악을 형상화한 존재를 옆에서 바라보며 파악하고자 했다면, <종의 기원>은 악 그 자체가 되어 존재의 방식을 보여준다.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어떠한 선입견을 갖지 않기를 권한다. 정유정은 소설에 ‘여성성’이라고 딱지를 붙여 설명할 요소를 구현하지 않는다. 작가의 성별보다 캐릭터들의 성별이야말로 이야기에서 중요한 원인과 결과가 되고, 그것은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주인공 ‘유진’이 잠에서 깨어난다. 머리는 알 수 없는 액체가 잔뜩 묻어 꾸덕꾸덕하고, 손 역시 끈적거린다. 그는 발작이 시작되기 직전임을 직감한다. 며칠간 약을 끊은 상태이니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발작을 기다리는데, 죽은 형을 대신해 어머니가 집에 들인 ‘해진’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방을 나간 유진은 거실에 놓인 물체, 끈적임의 정체인 그 물체가 죽은 어머니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라면, 사건이 발생하는 즉시 범인이 누구일지 탐색에 나서게 된다. 지금 피를 뒤집어쓴 우리의 주인공이 누명을 썼으리라 짐작하고, 진범이 누군지 찾는 과정이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종의 기원>의 미스터리는 다르게 작동한다. 상황 파악에 혼란을 겪는 유진의 시점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되지만, 독자는 곧 자신이 가장 위험한 자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와 그를 둘러싼 여자들(어머니와 이모)과의 관계,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등이 무겁게 차근차근 드러난다. 주인공의 해피 엔딩을 바랄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붙들고 읽게 된다.

맨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하며 한국에서 뒤늦게 <채식주의자> 열풍을 몰고 온 한강의 신작 <흰> 역시 눈에 띈다. 여기서 잠깐, <채식주의자>의 수상 이후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그 책은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요?”였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가? 문장이 뛰어난 소설? 짜임새가 훌륭한 소설? 잘 읽히는 소설? 철학을 가진 소설? 모두 다르게 답하겠지만, 소설을 드물게 읽는 독자일수록 플롯이 강렬한, 그래서 잘 읽히는 이야기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어딘가에 반전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채식주의자>는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보다는 영문 모를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당혹감을 낳는 듯하다.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를 왜 쓰고 읽는가? <흰>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줄거리’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독자가 있을 성싶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자신을 규정하지만, 플롯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심상은 바로 제목의 ‘흰’이다. 흰 것들.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작가는 흰 것이 떠올리게 하는 무수한 것을 문장으로 옮겨놓았다. 목차는 크게 나, 그녀, 모든 흰 이렇게 셋으로 나뉘고, 그 안에는 배내옷, 안개, 초, 진눈깨비, 파도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흰 것이 나열된다. 그리고 하얗다는 말 뒤에 숨은, 연기, 침묵, 소복, 수의 같은 죽음의 이미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복’에 대해 한강은 이렇게 썼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결혼식을 앞둔 이들은 서로의 부모에게 옷을 선물해야 한다. 산 자에게는 비단옷을, 망자에게는 무명 소복을. 함께 가줄 거지, 라고 동생은 전화로 물었다.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 동생의 신부가 마련해온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절 아래 풀숲에서 태웠다. 그 모습을 보며 묻는다. “흰옷이 그렇게 허공에 스미면 넋이 그것을 입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할 인사는 ‘작별’에서 전해진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너무 한낮의 연애>는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동명의 소설이 실린 김금희의 단편집이다. 그녀의 이름이 김금희라는 이름이 낯설지도 모르지만, 맨 앞에 실린 표제작을 읽으면서 그녀에게 큰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필용’은 갑작스레 한직으로 인사이동을 통보받는다. 그는 16년 전, 자주 들르던 종로의 맥도날드를 떠올리고 그곳에 드나든다. 왜 여기에 갑자기 꽂힌 거지 하는 막연한 호기심은 맞은편 건물에 걸린 현수막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이어진다. 옛날 옛적의 여자친구 ‘양희’가 쓴 희곡을 공연하는 연극 광고 현수막이다.

원래 양희와 필용은 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양희가 필용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때까지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던 필용은 딱히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단호하게 사랑을 말하는 이 고백에 매여버린다. 그리고 시작한 것처럼 갑자기 사랑이 끝나버렸다고 양희가 선언하자, 그간 시큰둥하던 필용은 그녀의 매력을 나열하며 매달린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물어뜯기 시작한다.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젊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과거의 연애를 떠올리던 남자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만 그것을 돌이킬 기회는 오지 않고, 현실의 문제들은 여전히 그를 옥죄어온다. 이 한 편의 강렬함이, 단편집의 소설들을 전부 읽게 만든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와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도 추천한다. 앞으로 한동안 신간이 나올 때면 장바구니에 담을 새로운 이름을 만났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