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역할놀이

한참 야근을 하는데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과장님, 신제품 시연회 일정 결재 부탁드립니다.’ 얼른 답을 보냈다. ‘지난번에 검토한 일본산 초박형 말인가? 알겠네. 그리고 김대리. 이달 실적 보고서는 언제쯤 완성되는 건가? 말일이 코앞인데.’ 마치 고딕체로 강조된 듯한 남자친구의 답문.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과장님의 주말 가족 행사와 2주간의 해외 출장, 평소보다 일찍 터진 생리 등 연달아 이어진 악재로 이달 저희 팀은 실적이랄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 소중이가 이번 시연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소중이가 과장님 얼굴만 봐도 눈물이 울컥 나올 태세입니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크흡,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둘다 호기심이 왕성한 편이어서 이런저런 성인용품이나 섹스 판타지에 관해 자주 얘기를 나누는데, 비록 휴대폰 문자지만 대체로 사무실이나 퇴 근길 지하철에서 읽게 되다 보니 혹시나 주변에 보는 눈이 있을까 봐 적나라한 단어는 쓰기가 곤란했다. 그러던 차에 남자친구의 장난으로 시작한 상황극은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를 안겨주었고, 지금 우리는 경쟁적으로 역할 놀이에 심취해 있다. 누가 들으면 분위기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침대 위의 섹스 어필과 별개로 관계 후 아쉬운 점이나 서로 바라는 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장난처럼 전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한번은 그의 그곳 털이 너무 길어서 오럴 섹스를 하기가 불편했다. ‘대장, 지난 구강 훈련에서 엄폐물이 많아 목표물로 전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음 소집 때 장애물의 길이를 5mm 제거하도록 허가해주십시오!’ L, 회사원(29세)

 

#로맨틱 #섹스토크 #성공적

남자친구와 나는 둘 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잠자리에 대해 얘기하기는커녕 섹스를 할 때도 서로 말 한 마디 안 하는 타입이었다. 섹스는 단순했다. 나는 사실 오르가슴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지루함을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묵언의 섹스를 계속 해왔다. 어느 날 결혼한 친구가 내 고민을 듣더니 조언했다. “말해야지.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잖아. 못한다고 냅다 구박하라는 얘기가 아냐. 의외로 이런 대화에 감성이 중요하다고. 돌직구를 날리되 감정에 호소하는 거야. ‘자기와 보내는 시간이 참 좋다, 하지만 여자 몸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다, 오르가슴에 어떡해야 닿을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기랑 할 때는 알고 싶다’ 등등. 로맨틱, 진솔함, 성공적, 오케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속궁합은 쟁취하는 거야.” 심기일전한 나는 어느 밤 그에게 친구가 예로 든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읊었다. 남자친구는 잠시 당황한 듯 나를 바라 보더니, ‘네가 그런 생각 하는 줄 몰랐네’ 하며 말끝을 흐렸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후회한 것도 잠시, 그의 한 마디에 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럼… 지금 알아보자”. 그렇게 우리는 사귄 지 2년여 만에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진실로 탐닉하는 시간을 가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자친구는 나에게 들은 가장 감동적인, 동시에 가장 흥분되는 말로 그날 밤의 고백을 꼽는다. 우리의 속궁합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고 있다. J, 대학원생(27세)

 

야한 칭찬도 칭찬이다

현재 8개월째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와 나는 침대에서 기본적으로 죽이 잘 맞는 편이라 특별히 섹스에 대한 자세한 리뷰나 구체적인 감상을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런 발군의 속궁합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누는 일명 ‘섹드립’도 일조 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야한 농담은커녕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러워했었다. 하지만 천진하면서도 능글맞은 성격의 남자친구는 데이트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햇빛에 까맣게 탔다고? 자기 초콜릿 됐네. 오늘 밤에 다 핥아 먹어버려야겠다’ ‘우리 ㅁㅌ에서 ㅅㅅ할까? 왜 그렇게 놀라. 마트에서 시식하자는 말이야’ 등 근본 없는 농담으로 번번이 내 말문을 막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저질스러운 말일 수 있지만 불쾌하지는 않다. 남자친구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정작 나는 자신 없고 부끄러워 가리기 바쁜 비루한 내 알몸도 늘 제일 섹시하다고 말해주고, 나와 보내는 밤이 기대된다고 말한다. 예쁘고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몸을 빗대어 찬양하는 그의 섹드립은 매번 넌 교정을 해야겠다는 둥, 네가 날씬한 체형은 아니지 않냐는 둥 외모 지적을 일삼던 전 남친의 개똥 같은 발언에 비하면 백배는 듣기 좋다. 남자친구의 더티 조크가 자존감 고취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요새는 나도 덩달아 나름 창의적인 방법으로 내게 그의 페니스가 무척 귀하며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피드백을 하곤 한다(크기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남자들, 은근히 확인받고 싶어 한다). 섹스가 끝난 후 늘어진 그의 페니스에 이불을 고이 덮어주며 작게 ‘수고했어 존슨, 네가 최고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하고 속삭이는 내가 우스웠는지 남자친구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여자친구의 실없는 농담에서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눈치다. P, 그래픽 디자이너(2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