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동안 푹 빠져 있던 썸녀가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하곤 연락이 두절되어버렸다며 하소연하는 친구 K. 그는 한 술자리에서 만난 그녀의 연락처를 받았고, 이후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간다거나 추운 날이면 코트를 벗어 덮어주는 둥 온갖 정성을 쏟았으며, 풋풋한 주말 데이트까지 여러 번 즐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해볼까 하던 K를 두고 이제 와 홀랑 사라져버린 썸녀의 의도는 뭐였을까? 달콤한 썸의 맛만 실컷 즐기다가 정작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건 꺼리는 여인들의 속마음은 대략 이렇다.

초미니 스커트를 즐겨 입고 늘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후배 H. 그녀는 누가 봐도 화려한 연애 경력을 가졌을 거라 짐작할 만큼 강렬한 비주얼을 지녔다. 하지만 그녀는 28년간 단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는 모태솔로다. 그렇다면 H가 남자를 모르는 순진한 소녀냐고? 전혀. 그녀는 수십 명의 남자와 썸 타는 관계를 지속하던 나름대로 밀당 전문가다. “썸에도 종류가 많지. 별로 좋아하는 감정이 없어서 미적지근했던 적도 있고 반대로 매일 밤을 뜨겁게 달궜던 ‘19세 이상 썸’도 있었고. 분명 스쳐 보내기 아깝던 남자도 있었어. 근데 이상하게도 난 연애라는 이름으로 관계의 틀을 정해놓는 게 싫어.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면 나만의 생활 패턴에 그가 발을 들여놓게 되잖아. 아직은 내 영역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 내가 좀 이기적인 거겠지?” 진한 스킨십까지 제법 여유롭게 허용하던 그녀에게 차여버린 남자들은 아마 한창 맛있게 밥을 먹다가 도중에 영문도 모른 채 홀랑 수저를 빼앗겨버린 심정이 아니었을까? H가 언젠가 놓치고 싶지 않은 진짜 사랑을 만났을 때 어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헤맬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썸 타는 법 하나는 완벽하게 마스터한 모태솔로녀라면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H처럼 자기애로 똘똘 뭉쳐 자신이 왜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여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친구 S의 경우는 실속형 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여러 남자들을 동시에 만난다. 절대 사귀진 않고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다가 서로에게 익숙해질 때쯤 단호하게 끊어내는 식이다. S의 주위에는 같이 술 마시기 편한 남자,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만나면 재미있는 남자,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똑똑한 남자 등 참 다양한 남자가 있다. 요즘엔 3명의 남자를 만난다. 각각 요리사, 유학생, 자동차 기업 사원이다. 모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나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텐데 그런 스케줄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S를 보면 문어발식 썸을 지속하는 것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일이겠거니 싶다. “얘도 좋고, 이 오빠도 좋아. 다 괜찮은 사람들이니까 만나지. 괜히 몇 년씩 질질 끄는 연애하면 머리만 아파. 뭐 하러 사랑 운운하며 감정을 소모해? 일단 좋으면 다 만나보면 되지.” 굳이 사랑 같은 진한 감정을 섞지 않아도 충분히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며 뜨거운 스킨십까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썸의 시대다. 원하는 만큼 즐기고 지지부진하다 싶으면 깨끗이 그만두는 S의 썸 형태는 그녀가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찾아낸 맞춤형 알뜰 연애 방식인 셈이다.

한 달에 5명 정도의 남자와 썸을 타는 친구 M은 한 명씩 신속하게 갈아치우는 경우다. 소개팅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남자를 만나고 세 번 정도 데이트를 한 후 별로다 싶으면 바로 관계를 끊는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팜므 파탈 스타일의 관계만을 가져온 데는 나름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은 이유가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절절하게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 그와의 결혼을 위해 상견례까지 마친 어느 날 그 남자가 회사에서 해외 발령을 받게 됐고, 장거리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갈등을 겪으며 둘은 이별했다. 헤어지고 2년이 넘도록 그를 못 잊고 괴로워하던 M은 심지어 그가 사는 곳까지 찾아가 매달리곤 했다. 그가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크나큰 상처를 받은 그녀는 한 달 가까이 슬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고, 몇 달 전부터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미친 듯이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 “진심 같은 건 다 시간 낭비야. 그냥 이렇게 여럿 만나면서 결혼할 남자를 찾는 거야. 내가 정해둔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 남자여야 해. 비주얼도 좋아야 되고. 술버릇이 있으면 안 되지. 저번에 만난 걘 연봉이 너무 적어.” M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며 마음에 벽을 만들었다. 이토록 쉽고 빠르고 간편한 ‘썸’을 반복하는 게 과연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무리 현실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를 선호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결혼까지 생각할 만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면 조급하게 결론을 내는 썸보다는 한번 더 진득한 연애를 해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썸만 타고 내빼는 그녀들의 입장은 한편 이해할 만하기도 하고 또 꼭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다. 연인으로 발전을 하든 깨끗이 헤어지든 꼭 둘 중 하나만 선택하란 법도 없다. 이미 썸과 연애를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해졌고, 오히려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거야, 우리 1일째야’ 하는 식의 연애는 촌스럽게 느껴진다. 남녀 관계에 있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토록 쿨한 썸녀들이 어느 날, 없으면 못 살 내 남자라며 구구절절한 연애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른다. 언젠간 도저히 썸만 타고 보내기에는 아쉬운 누군가와 마주칠 수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