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이름이 역사의 정도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9)

18세기 초 영국을 통치했던 앤 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시대극. 이렇게 말하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어떤 그림이 떠오른다. 사치스러운 차림새로 화려한 왕궁을 드나드는 왕족과 귀족들. 한데 이 영화에는 그 익숙한 풍경을 처음 보듯 새롭게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철저히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과 오랜 심복 사라(레이첼 와이즈), 여왕의 관심을 새롭게 받는 하녀 애비게일(에마 스톤), 세 여성의 삼각관계에 주목한다. 욕망과 권력과 애정이 소용돌이치고,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삼각관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아무리 여왕의 시대라해도, 여성 캐릭터 대다수가 권력가 남성 사이에서 희생되거나 그 침대를 노려야 하는 기존의 시대극과 확실히 다르다. 이 영화의 세 여성은 그들의 성적, 정치적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여왕이 사라에게 “난 그 애(애비게일)가 입으로 해주는 게 좋아!”라고 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남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 풍경이 이렇게까지 새롭고 짜릿하게 느껴지다니. 페미니즘은 결국 지금껏 차별받은 존재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인간적인 행위다. 최근 한국의 사극영화가 꽤 지겹게 느껴졌는데, 이 영화에서 희망을 봤다. 교과서를 가득 채운 남성의 이름이 역사의 정도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어느 시대든 숱한 여성들이 살았고, 각자 욕망을 품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부단히 움직였다. ‘남자들의 시대’라는 꼬리표에 더 이상 숨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라. writer 장성란(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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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무력하다고 생각하는가?
<와즈다>(2012)

리지 보든, 아그니에슈카 홀란트 같은 선구자들이 만든 페미니즘 영화를 허겁지겁 삼키듯 찾아 보던 시절이 있다. 그러면서 얻은 건, 젠더 이슈에 무지했던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강력한 예감이다. 동시에 바람도 생겼다. 보다 대중적인 화법의 페미니즘 영화를 만날 순 없을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날아온, 심지어 그 나라 최초의 장편인 <와즈다>는 그 바람을 이뤄준 작품이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지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전거로 씽씽 달리고 싶은 열 살 소녀의 이야기다. 소녀가 자전거를 사기 위해 쟁취하려는 건, 깜찍하게도 교내 코란 경전 퀴즈 대회의 우승 상금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불가능한데 영화를 찍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이 작품을 연출한 여성 감독 하이파 알 만수르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차량 안에 숨어서 무전기로 현장을 지휘했다. 금기의 벽을 부수고 달려 나가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이 유쾌한 영화의 힘은 놀랍다. 개봉 이후의 반향 덕분에 율법이 바뀐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2013년 4월부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영화가 무력하다고 생각하는가? 영화는 세상을, 여성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와즈다>는 그 짜릿한 증거다. writer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진짜 공포는 지선이 ‘엄마답지 않다’는 관객의 이의 제기였다
<미씽: 사라진 여자>(2016)

페미니즘이 성별에 대한 낡은 사고를 새롭게 바라본다는 의미라면 내게 그런 계기를 준 영화는 <미씽: 사라진 여자>다. 일하는 여자에게 워킹맘은 이미 현실이거나 닥쳐올 현실. 이혼한 워킹맘인 주인공 지선(엄지원)이 믿고 의지하던 보모 한매(공효진)에게 어린 딸이 유괴된다는 설정부터 오싹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지선이 ‘엄마답지 않다’는 관객의 이의 제기였다. 퇴근하자마자 급히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아이가 사라진 사실을 뒤늦게야 아는 것을 두고 하는 지적이다. 격무에 시달리는 워킹맘이 그날 따라 바쁜 사정이 있었다는 묘사가 충분했음에도 말이다. 이런 반응이 마치 엄마인 여성이 단 한순간이라도 모성애 외의 다른 동기로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성이 주인공이었어도 같은 장면에서 비난받았을까? 이 영화를 준비하며 이언희 감독은 어떤 남성 영화인에게 “남편한테 밥 안 해주죠?” 란 말을 들었단다. 이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뼈저리게 드러난다. writer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생사를 다투는 순간 앞에 남성과 여성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버드 박스>(2018)

맬러리(샌드라 블록)는 때로 거칠게 아이들을 몰아붙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버드 박스>는 공기 중에 퍼진 무언가에 노출된 모든 사람이 곧바로 자살하는 괴현상에서 살아남아 두 아이를 지키는 맬러리의 이야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흔히 나오는 ‘가족을(지구를) 지키는 남자, 아이들을 챙기며 뒤에 서있는 여자’의 구도는 이 영화 어디에도 없다. 영화는 시작점에서부터 설명한다. 냉정하게 출산을 기다리는 미혼모이자 화가인 맬러리에게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을 거라고. 이후 감독 수잔 비에르는 여성인 맬러리가 아닌 재난 이후의 생존 과정에 집중하며 재난영화의 본분에 충실한다. 생사를 다투는 순간 앞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있을 뿐이니까. 인근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맬러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급류 위에서 나룻배를 타고 안전하다고 믿는 곳으로 떠난다. 눈을 가리고 오직 감각에만 의지한 채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과 유일한 미래일지 모르는 아이들을 지켜내며. 맬러리에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처럼 뛰어난 신체적 능력이 없다. 그는 단지 약한 자를 보호하는 사람,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동시에 사고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며 위급할수록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똑똑한 인간이다. 밋밋한 서사 위에 ‘강한 여자’ 캐릭터만 우뚝 솟아 있던 근래의 여성 중심 영화들이 못내 아쉽던 차에 수잔 비에르와 샌드라 블록이 <버드 박스>를 넷플릭스에 내놓았다. 넷플릭스 가입자의 3분의 1이 이 영화에 열광했다. 넷플릭스에서는 이외에도 강한 여성이 이끌어가는 매력적인 서사를 제작 중인데 그 풍부한 라인업에 비해 한국의 극장가가 이다지도 빈곤한 이유는 깊이 고민해야 한다. writer 김소영(<마리끌레르>피처 에디터)

당신이 옳았다고, 나도 당신처럼 싸울 거라고
<더 포스트>(2017)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일찍이 <더 포스트>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밝혔고, 각본은 1985년생의 여성 작가 리즈 해나가 썼다. 남성 중심 사회와 업계에서 여성 발행인으로서 신념을 지켜나가는 캐서린(메릴 스트립)은 존재 자체로 일하는 여성들을 고양시킨다. 설사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던 관객일지라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던 캐서린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마침내 관철시키는 과정을 담은 <더 포스트>를 보면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화의 후반부, 법정에서 나오는 캐서린을 둘러싼 젊은 여성들의 선망과 긍지, 설렘이 뒤섞인 눈빛이 이 영감의 결과를 말해준다. 당신이 옳았다고, 나도 당신처럼 싸울 거라고. 여성의 이야기가 부족하고,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여성의 이야기는 더 부족한 현실에서 캐서린, 그리고 그와 연대한 여성들은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를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writer 이지혜(영화 저널리스트)

여성의 자리는 어떤 방식으로 위협받고 대체되는가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행복>(1965)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자신의 영화 세계로 적극적으로 끌어 안은 아녜스 바르다. 바르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독해된 건 1970년대 이후지만 초기작에서도 바르다 특유의 감각으로 여성의 시간과 내면을 그린 지점을 읽을 수 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보자. 클레오(코린 마르샹)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며 두려워한다. 오후 5시부터 결과가 나오는 7시까지 파리 곳곳을 누비며 두려움을 견딜 것이다. 영화의 러닝타임과 클레오가 극 중에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일치하며 이로써 관객은 클레오의 두려움과 방황을 함께한다. 다행스러운 결과를 받아든 클레오. “이젠 겁나지 않아요. 행복한 것 같아요.”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지만 바르다는 파리를 헤매며 삶과 죽음을 생각했을 클레오의 복잡한 심경을 세밀히 그렸다. 이어서 바르다는 <행복>에서 여성의 행복과 불행, 활기로 충만한 삶과 절망에 압도된 죽음에 집중한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프랑수아(장 클로드 드루오)와 테레즈(클레어 드루오) 부부의 소풍길. ‘여기, 이들의 행복이 있다’고 속삭이듯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가 흐르고 형형색색의 색감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하지만 프랑수아가 낯선 여인 에밀리(마리 프랑스 부아예)와 사랑에 빠지고 테레즈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테레즈의 자리에 에밀리가 오고 프랑수아의 새 가족은 또다시 행복한 소풍을 떠날 것이다. 영화는 무심히도 ‘여기, 이들의 행복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가부장, 이성애 부부 중심의 가족 내에서 여성의 행복은 어떻게 성취되고 좌절되나. 여성의 자리는 어떤 방식으로 위협받고 대체되는가. 당대 여성의 심리와 관계도에 대한 바르다식 통찰이다.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