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난 아니래?

소개팅에서 만나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K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게 몇 시에 태어났느냐 고 물었다. 그런 것에 관심 없어서 잘 모른다고 했더니 엄마한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해서 굳이 엄마 에게 전화해서 물어본 게 기억난다. 몇 달 후 우리가 조금씩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아갈 때쯤 K가 뜬금없이 이별을 선언했다. 전날만 해도 꿀 떨어지는 저녁을 보내고 헤어졌기에 나로선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K를 기분 나쁘게 만든 행동이나 말을 했는지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봤지만 짚이는 일이 없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K를 달랬다. 퇴근 후 집 앞에서 만난 K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K의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다니는 용한 점집이 있단다. 할아버지의 병세, 아버지의 사업 등이 모두 그 점쟁이 덕분에 호전됐다고 믿는 K의 집안에서는 자녀들의 결혼 상대도 모두 그 점쟁이 말에 따랐다. K의 두 언니 모두 점쟁이가 궁합이 좋다고 말한 남자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K는 내게서 태어난 시간을 알아간 후 엄마에게 전했고, K의 엄마는 그 점쟁이를 찾아가 나의 사주와 우리의 궁합을 본 것이다. 그 결과 내가 주변에 여자가 많고 무엇보다 자식운이 없다는 점괘가 나왔단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K는 미안하다며 울기만 했다. 나 몰래 내 사주를 본 것부터도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그냥 돌아섰다. 이 정도 만나고 헤어진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점쟁이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M(변호사, 33세)

하지 말랬지!

나는 <왕좌의 게임>의 골수팬이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1 이 끝나자마자 원작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여행 갈 때마다 하나씩 사 모은 철왕좌, 킹스핸드 등의 굿즈는 이미 선반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지막 시즌을 방영하는 올봄을 내가 겨우내 얼마나 기다렸는지 A도 너무나 잘 안다. 연애 초 A에게도 <왕좌의 게임> 영업을 시도했지만 시즌 1을 세 달에 걸쳐 보더니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대망의 시즌 8이 시작하고 얼마 후 <왕좌의 게임>을 보는 친구들과 우리 집에 모여 마지막 회를 함께 보 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그중 한 명이 계속 바빠 종영하고도 몇 주 를 더 기다려야 했다는 것. 내가 속한 모든 커뮤니티는 마지막 회 가 끝나자마자 관련 ‘짤방’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행여 스포일러 에 노출될까 봐 커뮤니티에 아예 접속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2 주를 보내고 상영회 전날. 친구들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마트에 서 장을 보며 여느 때처럼 A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A가 내일 내 가 <왕좌의 게임> 볼 동안 자기는 뭐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심심하면 너도 오라고 했더니 A가 느닷없이 ‘근데 나 오늘 인터넷에서 누가 7왕국 왕이 됐는지 알았다’라고 했다. 나는 침착하게 말 하지 말라고, 3주 동안 기다린 것 알지 않느냐고 했다. A는 ㅋㅋ 웃 으며 ‘래! 메롱~’이라고 답장을 했다. 두 눈을 의심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후 이어지는 A의 연락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A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아직도 화나 있어?’ 하며 웃는 데 옥수수를 털어버리고 싶었다. 웃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만나자고 말했다. 돌아선 순간부터 전화기는 불이 났다. ‘고작 이런 걸로 헤어지는 게 말이 되냐, 친구들한테 뭐라고 말하냐.’ 문자메시지와 전화가 끊임없이 왔다. 휴대폰에서 A를 차단하고 나는 친구들과 즐거운 <왕좌의 게임>의 밤을 보냈다. 그 자리의 모든 친구들은 나의 선택을 이해했다. D(디자이너, 31세)

너 없인 살아도

나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아이돌을 덕질했다. 대상은 수년에 한 번씩 바뀌었지만 덕질을 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최애’ J를 위해 마음껏 돈을 쓰는 짜릿함에 더 적극적으로 덕질을 하고 있다. 팬미팅에 가기 위해 월차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홍콩이나 일본에서 하는 콘서트를 보기 위해 휴가 삼아 친구들과 해외 원정을 가기도 한다. B가 내 행동에 기함한 건 새로 나온 앨범을 50장 샀을 때다. 똑같은 앨범을 왜 그렇게 많이 사느냐는거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인회에 가려면 이것도 부족해, 나보다 훨씬 많이 사는 사람 들도 있다니까!”라고 말했다. 이후 내 덕질에 대한 B의 간섭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한 날에는 “너 집 에 가면 보나마나 유튜브로 J만 볼 거 아냐. 차라리 나랑 대화하는 게 훨씬 너한테 득이지” 하며 전화를 안 끊 거나 같이 있을 때 브이앱 라이브가 뜨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집중해서 보는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기도 했다. 급기야 한 달에 J에게 돈을 얼마나 쓰느냐, 우리도 슬슬 결혼 자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듯 묻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진지하게 B와 J의 중요도를 고민할 뻔했다. “J를 좋아한 지 6년째인데 고작 1년 만난 네가 내 인생에서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라고 일갈한 후 B와 헤어졌다. 나도 모르게 주눅 들고 B의 눈치를 본 날들이 너무 억울하다. N(바리스타, 2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