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김옥선의 전시 <베를린 초상(Berlin Portraits)>이 열리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들어 서면 비슷한 구도의 커다란 인물 사진이 줄을 맞춰 걸려 있다. 사진 속 재독 한인 간호 여성들은 1960년대에 베를린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다. ‘주변과 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작가는 이번엔 베를린에 사는 한인 간호사들의 집을 찾아갔다. 작가에게 선뜻 문을 열어준 그들은 마음의 문도 함께 열었다. 작가 역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음의 문이 열렸다. 어떤 이는 간호사로 일하며 모은 사업 자금을 들고 사라진 남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집을 따듯한 말로 안내했다. 슬픔을 강인함 뒤로 밀어놓고 낯선 곳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이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텍스트가 아닌 실재가 전하는 이야기와 그로 인한 마음의 움직임이 읽힌다.

전시의 시작점은 언제인가? 2017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라는 전시를 했다. 재독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기 시작한 시점이 1966년이니, 50주년을 기념한 전시였다. 처음 독일에 갈 때는 3년 계약직의 이주노동자 신분이었고, 후에 강제 귀국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명령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할 때 돌아가겠다며 체류 연장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했다. 당시 재독 간호사에 대한 독일 내 여론이 좋았던 터라 사람들이 선뜻 서명에 참여해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한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비자 기간이 연장된 것이다. 이는 세계 이주 노동사의 관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쟁취다. 현재 베를린에 베를린 재독 여성 모임이 있는데 주축이 간호사들이다.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국 작가와 간호사들이 뜻을 모아 자신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했고, 베를린에 거주하는 간호사 세 분이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많은 한인 간호사가 여전히 베를린에 거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작업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 때 만난 간호사들에게 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흔쾌히 자신들이 섭외를 도울 테니 베를린에 와서 해보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장비를 챙겨 베를린으로 떠났다. 당시 한 달 정도 베를린에 머물며 촬영했는데,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이듬해에 한 번 더 촬영했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국민들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기다. 여성 인권 수준은 더 낮았을 텐데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그렇다. 보통 ‘파독 간호사’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들은 이 표현을 거부한다. 누군가 보내서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서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루트를 만들어줬을 뿐이고 경비를 비롯한 모든 것을 개인이 준비해서 독일로 갔다. 그래서 파독이 아닌 재독 간호사라 부른다. ‘파독’이라는 말에는 가족을 위한 희생, 외화를 버는 애국, 이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 재독 간호사 여성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 덕분에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파독 간호사란 용어를 들었을 때는 이분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연민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개척자의 삶이다. 그렇다. 인권에 일찍 눈을 뜨고 투쟁하며 만들어간 삶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스럽다.

모든 촬영이 아주 사적인 영역인 집에서 이루어졌다. 인물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정서적으로 피사체와 가까워져야 하는 만큼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다. 나로서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재독 간호사들이 연세도 많고 살아온 세월 동안 경험한 일도 다채롭다. 지금까지 이방인을 주제로 외국인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때와는 다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바로 훅 들어온다고 할까? 내가 이런 작업을 위해 베를린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겼고 작업 의도를 잘 이해하셨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셨다. 거리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만나자마자 가까워지고 공감했으며 그들의 삶에 내가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음의 문이 열렸다.

재독 간호사 중에는 독일인과 결혼한 여성이 많으니 개인적인 상황이 비슷해 더 쉽게 교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나 역시 국제결혼을 했고 재독 간호사 중 많은 분이 독일인과 결혼했다. 나는 결혼 후 1년 정도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이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해서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가 고향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처음에는 내가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진 시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거주하는 보통의 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하면 외국에 나가 살라며 등을 떠밀던 때다.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인 여성에게는 비자를 발급해줬지만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에게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런 현실이 부당하다는 생각에 제주에 사는 국제결혼한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국제결혼 한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포트레이트인 <해피 투게더> 작업을 하게 됐다. 그 작업을 통해 국제결혼 한 부부를 대하는 법률이 얼마나 부당한지 시각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베를린 초상>을 작업하면서 내 미래의 모습이 재독 간호사의 현재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겪은 세월이 더 궁금했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토록 의연하게 지나온 굴곡 많은 생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난 너무 엄살을 부리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이주민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편견이 가득하다. 베를린에서 작업하던 2017년 당시 제주에 많은 난민이 들어왔다. 베를린의 간호사들은 이 뉴스를 접하고 자신들도 난민이자 이주민이었고 독일이 받아준 덕에 이렇게 자리 잡고 살고 있으니 우리 역시 난민을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재독 간호사들에게서 어떤 표정과 포즈를 이끌어내고 싶었나? 인물에 많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고, 연출로 상대방을 장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게 내 역할이었다.그분들이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를 바랐다.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크게 웃고 있지 않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크게 웃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면을 바라보라는 정도만 요구했고, 의자에 편히 앉아 이야기하다가 찍거나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는 정도만 연출했다. 그렇게 자신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있는 순간을 담았다.

사진에 인물의 이름이나 나이 같은 신상이 전혀 적혀있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개개인을 부각하기보다는 독일에 계신 간호사 모두에게 주목하고 싶었다. 한 개인의 삶에 있는 모든 서사에 경의를 표하지만, 전시는 이들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과 성취를 담고자 했다. 전시된 사진은 언뜻 보기에는 거의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된다. 반복을 통해 관람객이 사진 속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연스레 사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다. 각자 사진을 보며 대상의 서사를 완성해가길 바란다.

사진은 어떤 장점과 기능을 가진 예술의 매개체라고 생각하나? 사진은 기계가 찍는다. 나와 사물 혹은 인물 사이에 기계가 있기 때문에 사진 속 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실재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을 보여주는 힘을 지니고 객관성을 지닌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과장되거나 주관적이지 않으며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거다. 실재를 보여주는 사진이 좋다. 작업의 주제를 정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주관적이지만 카메라는 결국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그 정도의 거리감이 곧 객관성인 것 같다. 이번 전시 <베를린 초상>도 드라마틱한 느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 가치 판단을 포함하지 않고 관람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이다.

<해피 투게더>나 <베를린 초상> 등 작품을 기획할 때 주로 어떤 대상에 마음이 움직였나? 나는 국제결혼을 한 부부, 여성, 이방인, 난민을 주제로 주로 작업해왔다. 이번 전시작을 포함해 최근 작업은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되고 일렬로 병치되도록 해사람들이 사진 속 대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내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보여주며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작가로서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는지 궁금하다. 이방인에게 관심을 가진 건 나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주에는 남편처럼 외국인이 꽤 많이산다. 남편은 제주도에서 교직에 종사했었는데, 어느 날 그일이 하기 싫다며 다이빙 숍을 운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를 만드는 이유를 물었더니 세계 일주를 하겠다더라. 그렇게 혼자 책을 보며 1, 2년 공부하더니 배를 만들기 위한 자재를 구하기 시작했다. 철판을 알아보다 크기가 맞지 않아 외국에서 수입하는 합판을 구해 4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시간 날 때마다 대패질을 해가며. 우리는 보통 50세가 넘으면 노후를 준비하지 않나.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고. 그런데 남편이 꿈꾸는 것은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다. 그 배가 과연 뜰까 싶었다. 남편뿐 아니라 제주에 사는 외국인 중에는 직업은 돈을 버는 수단이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은 따로 있는 사람이 많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버는 거지. 삶을 보는 포커스가 달랐다. 그들을 보며 내가 살아온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이방인들에게서 어딘가에 정착해 집을 마련하고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보다 원할 때 어디로든 이주할 용기를 보았다. <함일의 배>나 <노 디렉션 홈> 같은 작업에서 나와 다른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 배는 어떻게 되었나? 배는 떴다. 만들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진수했다. 인생 작업이었지. 그런데 독일 국적으로 등록됐다. 외국 국적의 배가 바다를 통해 들어온게 아니라 제주의 바다에서 만들어졌으니 지금껏 없던 사례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요트 문화가 거의 없어 요트로 등록하는 게 꽤 복잡했고 6개월이나 걸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태풍이 왔다. 태풍에 배가 날아가서 등대에 맞고 깨졌다. 그야말로 인생 드라마 아닌가! 이 일련의 과정을 배의 이름이기도 한 <카벵가>라는 영상 작업으로 남겼다. 한 번 사는 인생, 극한까지 해본다는 남편의 태도가 부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