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세미

등단 후 5년 만에 첫 시집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을 냈다. 시인으로서는 낯선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처음 일주일 정도는 기분이 왔다갔다 했다. 책을 받았을 때는 마냥 좋았는데 막상 책이라는 물질이 돼 오니까 빼도 박도 못 하는, 되돌릴 수 없다는 상황을 인지했다. 여러사람들에게 축하받을 때는 모르다가 혼자 있을 때는 인생의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죄책감도 들고.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는 자신이 쓴 책에 작가 개인의 지난 시간이 담긴다는 것 아닐까. 설사 독자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지난 5년은 시인에게 어떤 시간이었나? 20대 내내 돈을 열심히 벌었다. 습작을 하면서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생계가 중요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쏟으면서도 ‘내가 하고싶은 건 언제 하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마침 등단 시기와 맞물려서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생겼다. 등단이 신호탄이 돼 이제 내가 꼭 하고 싶은 일, 시도 마음껏 쓰고, 공부도 마음껏 해보자 결정하고 대학원에도 입학했다. 시를 쓰면서 시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내게 시는 재활 치료 같은 느낌을 주더라. 사회적 생활을 하다 보면 조금 오글거리지만… 영혼의 근육을 잘 쓰지 않게 된다. 나 역시 그 부분이 많이 퇴화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등단하고 시 쓰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 세계가 좀 구축되고 재활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5년은 그런 시간이었던것 같다.

시를 오래 써야겠다는 자기 확신이 든 적도 있나? 처음부터 계기나 확신은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시를 안 쓰고는 살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각자의 현실적 고통이 있지 않나. 가족사나 경제적인 문제 등 다양한데, 적어도 내게 시는 그런 현실적 고통과 일상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와 같다. 그래서 시를 쓸 때 시 속에 일상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시를 격리된 다른 세계로 인식하고, 내가 도망갈 수 있는 세계로 보는 거다. 현실이 너무 힘들면 사람이 뾰족해지고 정신이 낮아지면서 좀 못생겨지는데 나는 시를 통해 좀 먼 곳으로 달아나고, 자신을 정화하는 측면이 있다.

 

시인 박세미

‘불행을 쫓으며/ 불안을 평안으로 여기며’(‘화이트아웃’), ‘모빌은 방의 호르몬으로서 타고난 균형 감각으로 평안과 불안 사이에 매달려 있습니다’(‘제3의 방’) 등 시집 곳곳에서 불안과 평안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불안과 평안이 한 덩어리의 공생 관계라고 보는 것인가? 맞다. 불안이 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평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정말 평안을 느낀 적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없을 것 같다. 돈과 명예가 생긴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불안할 것 같고, 더욱이 내면은 무엇으로도 쉽게 채울 수 없는 법이니까. 평안이라고 말하는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조금 편할 때는 있겠지. 하지만 그 잠시의 편안한 상태에도 불안하다. ‘왜 내가 이렇게 편한 상태일까?’ 하고 곧 불행이 닥칠 것 같은 불안이 있다. 그렇게 나는 불안과 평안으로 점철돼 있는 것 같다.

‘좋은 날은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다’(‘화이트아웃’), ‘어렵고 무겁게 만들고 싶어서/ 힘껏 무기력해진다’, ‘끈적한 햇빛이 내리쬐면/ 빈터에 앉아 묵묵히 흘러내려야지/ 다시는 결심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아무것도 하기 싫어’) 등 무엇도 할 수 없는 화자, 체념하는 화자의 단언하는 말이 지배적으로 많다. 이건 생활 태도이기도 하고 시를 쓰는 태도이기도 한데 섣불리 웃거나 울지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쉽게 절망하거나 쉽게 희망하는 일도 늘 경계한다. 이전에 시인이자 평론가인 장이지 선생님이 내 시에 대해 ‘비어 있는 욕망’, ‘수동성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는데, 그 표현이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화자들은 죽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살아 있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어떤 최저치에서 발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거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욕망이라고 본다.

‘살아 있는데 살아 있다고 느껴야 하나?’, ‘죽지는 않았지만 죽어 있다고 느껴’라는 구절이 있는 시 ‘떠나는 나에게’에서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특정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시집을 아우르는 정서를 정의하자면, 단어보다는 동사로 표현하는 편이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있다’, ‘되다’다. 있기는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만 있는 ‘있다’, 그래서 시에도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굼벵이, 검은콩, 피규어 등 뭔가 계속 되려고 하는데 그 존재가 특별하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 듯한 존재들을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같다. 처음부터 의식하고 쓴 건 아닌데 묶고 나서 깨달았다.

무력감 속 미비한 욕망은 시 속 화자뿐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20대의 보편적 정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맞는 것 같다. ‘좋은 날은 평생 오지 않을수도 있다’라는 구절은 시적인 글이라기보다 내가 일기장에 많이 썼던 문장이다. 사람들이 어떤 순간에는 열심히 산다. 내게도 열심히 살면서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당시의 고통을 감내하던 시간이 있었다. 이 고통이 훈련이며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이걸 극복하면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희망 같은 것을 붙들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아,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있겠다. 평생 좋은 날이 안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이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지 않고 산다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쉽게 기대하지 않고, 절망도 적당히 하는 태도가 생겼다. 무엇보다 과한 발화를 싫어한다. 가령 슬픔을 토해내는 격정적인 시를 좀 과하다고 느끼는 편이다. 시를 감정을 토해버리는 그릇으로 쓰는 건 아닌지, 이 시어들이 정확히 계량한 언어인지 고민하고 경계하는 편이다.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고 지우는 방식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미니멀하기도 하고, 회색의 느낌, 미지근한 온도를 갖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시인 박세미

맞다. 미지근한데 단순히 미지근하다기보다 미지근하게 단언한다. 거기에서 시인만의 힘이 느껴진다. 시의 성향이 시인의 성향과 닮아 있을 수 있겠다는 추측을 했다. 시를 쓰기 전부터 극도의 감정 기복을 약간 저급하게 여기는 태도가 있었다. 물론 이 생각은 내가 틀렸고, 건강하지 않은 태도라고 본다. 오히려 시를 쓰면서 표현하는 건강함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럼에도 미지근한 온도와 약간의 절제로부터 정확함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장욱 시인이나 박상순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약간의시니컬한 태도 같은 것이 오히려 세상을 더 정확하게 껴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시집 제목인 <내가 나일 확률>은 ‘순수한 너를, 100퍼센트의 너를 찾기를 바라’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시인의 어법이라면 그 확률치를 셈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이런 성향을 갖고 있어’라고 규정하는 말에 대한 반발심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이게 나의 본모습이 아닌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사람의 성격 혹은 독특한 원형이 과연 어디에 있고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나. 오히려 내가 꼭 나여야 해? 내가 나일까? 하는 질문에 관심이 많다. “너는 지금 네가 몇 퍼센트라고 생각해? 몇 퍼센트였으면 좋겠어?’’라고 묻는다면 “0퍼센트였으면 좋겠어”라고 답하고 싶다. 100퍼센트 이게 나야 하고 확신하고, 온전히 아는 순간 과연 행복할까? 아닐 것 같다. 나는 스스로도 내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내 비위를 잘 못 맞출때가 많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이걸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했는데 막상 그렇게 좋지도 않고 늘 빗나가는 느낌이다. 나에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자주 들고, 그게 때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그 안에서 불안과 의심을 오가며 계속스스로 움직이는 걸 느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책이 나오고 사인할 일이 생기는데, 이때 ‘우리가 우리일 모든 확률이 사랑’이라는 구절을 많이 쓴다. 0퍼센트든, 100퍼센트든 그게 몇 퍼센트든 상관없이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그 질문 속에서 만들어져가는 최후의 것이 자신의 원형과비슷하고, 원형에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원형이나 취향, 성격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걸 계속 찾아간다기보다는 삶 속에서 환경에 의해, 주변 친구나 선생님과 주고받는 영향에 의해, 내 경우에는 이렇게 시를 만나고 쓰는 과정을 겪다 보면 내가 죽기 전에 어떤 최후의 무언가가 나를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 건축과 건축 이론, 비평을 공부한 시인의 독특한 이력이 시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가? 두 분야를 오가며 건축과 시의 미묘한 교집합도 느낄 것 같다. 앞서 말했던 회색의 관점, 미지근한 온도, 약간의 객관성과 시니컬함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 건축이라는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건축은 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으며, 건축 하는 사람은 높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감도를 그리듯이 인간의 눈높이가 아니라 새의 눈높이에서 무언가를 조망하는 시선을 갖고 있다고 할까. 그런 눈이 시에도 도움이 많이 된다. 시를 쓸 때 자주 하는 생각이 좋은 공간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공간이라는 것은 무형의 관념인데 건축가들은 이를 실제적인 치수와 도면, 재료로 관념을 환원해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건축가는 감각을 정량화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데 신기한 건 이렇게 철저히 정량화한 구조를 사람들은 편안함이나 안락함 등의 감각으로 다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건축의 메커니즘이 시에도  있다고 본다. 시인이 하는 일도 결국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기쁨, 잡히지 않는 감정과 감각을 언어라는 실제적인 활자로 환원하는 거니까. 이때 시를 읽는독자들이 이를 논리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공간,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이게 좋은 시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 어떤 치수가 걸리적거리거나 어떤 단어가 감각으로 오지 않고 머리로만 다가온다면 좋은 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있다.

시 ‘기분은 디테일에 있다’에서의 묘사가 참 아름답고 생생하다. 시집 전체에서 가장 행복에 가까운 시가 아닐까. 고양이가 첫 행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처럼 시인을 행복하게 하는 일상의 순간들도 있나? 얼마 전 아침달 출판사에서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라는 댕댕이 시집을 출간했다. 거기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강아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너무 행복하다.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사회와 만나는 그 시간이 참 좋다. 함께 산책하고, 강아지를 목욕시켜 털을 빗기고, 뽀뽀하고, 같이 누워 있는 그 시간이. 이전에는 내게 없던 여유였고,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지금의 가장 큰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