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경>에 <재윤의 삶>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다. 특별히 서울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한 이유가 있나?
<재윤의 삶>이 제목 그대로 재윤의 이야기라면, <서울 구경>에서는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소재를 다루고 싶었다. 나는 경상도의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더 넓은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0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도시를 동경한다. 서울이 단순히 지명이 아니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욕망의 개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책에 서울은 등장하지 않는다.
책을 펼치면 툭 떨어지는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입학 안내 팸플릿으로만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서울 구경>에는 부모를 잃은 형제가 등장하는데, 형 W는 동생 XX를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유학 보내려 한다. 그 고등학교 입학 안내 팸플릿을 내가 직접 그려 책에 끼웠다. 나는 이걸 ‘회심의 지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웃음) 주인공들에게 어느 날 입학 안내 팸플릿이 쥐여지듯, 독자들에게도 자연스레 스며들길 원했다. 팸플릿은 실제 입학 안내 책자에서 착안했다. 이 속에 담긴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힘든 입시 현실과 달리 셔터스톡 이미지처럼 웃고 행동하지 않나. 그게 이상하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W는 M을 만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서울 구경>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 M은 어떻게 설정했나?
M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늘 친구 수보다 소문에 등장하는 횟수가 더 많은 인물이다. 실제 내 경험이냐고 묻는 독자도 많은데, 나는 부끄럽게도 그런 가십을 이야기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소도시에 살다 보니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런 경우 전통 서사에서는 남성이 어려움에 처한 여성을 구원하는 왕자로 등장한다. 나도 이런 스토리를 많이 읽고 자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서사가 내 인생을 망쳐놓은 것 같다.(웃음) 그래서 <서울 구경>에서는 그 역할을 뒤바꾸고 싶었다. 이름 역시, 남자 주인공이 W(Woman)고, 여자 주인공이 M(Man)이다. W에게는 M을 만난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다. M를 만나면서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분리되고 싶은 동생에게서 해방되어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다만 M이 여성 히어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면 했다. 큰 야망이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여러 남자를 만나는 게 나름의 동력이다. 하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남자에게 의존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뿐이다.

‘원래는 내 상황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게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라는 M의 마지막 말이 <서울 구경>이 독자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인가?
W는 XX를 사랑하지만 전통적인 희생의 서사를 따르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몫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 역시 서울이 보여주는 꿈과 희망만 좇아 올라온 케이스다. 서울에 가면 이곳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살아보니 꿈과 희망을 제외한 영역, ‘서울적이지 않은 것’까지도 고민해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서울 구경>의 인물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질문을 던졌다.

이 메시지는 <재윤의 삶>의 ‘나는 나일 뿐인데 그걸 극복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 마지막 말인 ‘금방 익숙해질 거다. 난 원래 여기 살았으니까’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체념의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열망,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렇게 읽어주어 참 고맙다.(웃음) 두 권의 만화는 주어진 삶에 체념하는 내용이 아니다. <재윤의 삶>은 내가 불편했던 것들을 소재로 다루는데, 그것들을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하는 애증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를 들면, ‘가슴’을 소재로 한 만화 역시, 가슴은 태어날 때부터 내 몸에 있을 뿐인데, 가리느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 ‘그래도 가슴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너도 내 몸뚱이인데’라고 마무리한 것처럼, 내가 아닌 삶을 살 수 없다면 주어진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판단해야 했다.

<재윤의 삶>에서 가슴을 주제로 다룬 ‘우연하게도!’ 편이 주목을 받았다. 이건 그동안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실 <재윤의 삶>에서 가슴이나 생리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많지 않은데도, 그동안 자유롭게 다루지 못한 소재라 더 주목받은 것 같다. 여자의 몸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의 절반 이상이 공감할 소재인데도 말이다. ‘우연하게도!’는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그렸다. 여성의 이야기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시기다. 단, 가슴이 보이는 걸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너무 싫고 힘들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세상에 태어나니 가슴이 거기 있어서 생긴 일인데, 이걸 왜 없는 양 가리면서 살아야 하지?’ 하는 정도의 의문으로 표현했다. 그런 건조한 접근을 독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 생리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하다 못해 생리대를 빌릴 때도 창피한 일인 양 비밀스럽게 감추곤 하지 않나. 그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두 권의 책 모두 ‘웃픈’ 정서가 담겨 있다. ‘정재윤식 유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난해 연말 시상식에서 개그 우먼 박나래 씨가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한 개그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다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유머를 고민하면서도 마냥 다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건 모순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마냥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어떤 감정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그걸 의도하기도 했다. 하나의 창작물이 어떻게 사람의 모든 감정을 위로할 수 있겠나. 단지 독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누군가가 한국 땅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머라는 표현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싫고 불편한 것에 대해 말하는 건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도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대중매체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느낀 걸 솔직하게 그릴 용기가 생겼다.

<재윤의 삶>은 제목 그대로 재윤의 삶을 다룬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부담감은 없었나?
그에 대한 부담이 커서 편집을 많이 거쳤고,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솔직하게 그려서 신기하다는 독자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경험을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만화의 단초일 뿐이고, 그걸 이야기로 풀어갈 때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남의 이야기를 하듯 썼으니까. 교묘하게 편집을 잘한 셈이다.(웃음)

두 권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영감을 얻은 작품이 있나?
이란의 그래픽 노블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를 가장 좋아한다. 이란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이슬람교 정권의 정책 때문에 여성에 대한 압박이 심한 나라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으면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고, 옷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단속당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작가는 자기 자신을 연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권을 비판하는 투사가 되지도 않는다. 단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이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걸 내 방식으로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여느 90년대생 인물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입시를 준비한내 성장 서사는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러다 김정연 작가의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만화를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가상 디자이너의 일상을 건조한 유머로 엮은책이다. 이 책을 보며 꼭 엄청난 서사가 없어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많은 여성이 순정만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예전에는 멋있게 느껴지던 남자 주인공이 사실은 데이트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정재윤 작가에게 영향을 준 만화는 어떤 작품인가?
나 역시 그런 로맨스물의 충실한 소비자였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끌고 억지로 차에 태우는 장면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재윤의 삶>에 등장하는 노랫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힘이 없으니 네가 나를 이끌어 우리 관계를 완성하고 책임져달라’는 정서가 깔려 있는 노래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내 연애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다음 세대 아이들은 부디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여성의 시각을 담은 콘텐츠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나 역시 앞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려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나올 콘텐츠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을 계획인가?
은연중에 흘러가는 장면, 이를테면 뉴스 앵커나 팀장 캐릭터를 여성으로 그리는 등 이전에는 당연히 남성으로 그려지던 인물에 변화를 주고 싶다. 현재 서울신문 서울젠더연구소, 서울시 교육청의 성평등팀과 협업해 서울신문에 <오늘의 젠더 이야기 – 모던타임즈>라는 만화를 연재 중인데, 지금까지는 전래 동화에서 발견한 젠더 이슈에 대해 다뤘다. 지금 보면 굉장히 불평등한 일인데, 예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나,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던 작품을 골라, 다른 시각으로 다룬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깨닫게 되는 일이 참 많다. 앞으로 전래 동화가 아니더라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아이돌을 어떻게 다루는지, 인터넷 광고에서 여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