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오성훈

간호사, 널스노트 대표

작은 힘이 모여

대구·경북 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늘어나면서 의료진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힘을 보태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의료진이 의료봉사에 나섰다. 생업을 잠시 멈추고, 유학을 미룬 채, 시험을 앞둔 상황에서도 동료를 돕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널스노트의 오성훈 대표는 청도 대남병원과 안동의료원에서 3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의료봉사를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금세 진정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하루에 확진자가 1천명 이상씩 느는 것을 보고 심각한 상황으로 느꼈고, 대구와 경북 지역 의료진이 힘들어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현재 간호사의 업무와 상황을 대변하는 SNS와 간호사 업무를 돕는 앱을 운영 중인데, 처음에는 콘텐츠로 간호사 업무에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려 했지만 직접 겪은 상황이 아니어서 이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료진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리고 싶었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공론화해 지원으로 이어지기를 기대 했다.

코로나19 병동에서 간호사의 업무는 무엇인가? 우선 활력 징후를 측정한다. 환자들의 혈압과 체온, 맥박, 산소포화도 등 인체 대사를 측정하는 것인데 환자들의 상태가 일정하지 않고 모든 환자가 일관된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활력 징후 측정이 중요하다. 의사와 환자 증상에 관해 정보를 주고받고, 주사나 투약, 환자 이송을 돕기도 한다.

처음 갔던 곳이 청도 대남병원이다. 집단감염이 일어난 곳인 만큼 두려움이 컸을 것 같다. 최초로 집단감염이 일어난 곳이다. 의료진을 포함해 1백20명 이상이 확진자였고, 정신 병동이었기 때문에 난폭하거나 의사소통이 힘든 환자도 많았다. 의료봉사에 지원했지만, 청도 대남병원에 가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청도 대남병원으로 지정됐다고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근무할 병원을 선택할 수 없고, 그곳 상황이 급박 하다는 소식에 일단 가게 되었다. 도착한 날 병원 근처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지역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마치 유령 도시처럼 인적이 없었고 모든 카페와 식당이 문을 닫았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환자들이 복도에 누워 병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고 위생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방호복을 입고 활동하면 에너지 소모가 훨씬 클 것같다. 방호복을 입고 실제로 근무해본 건 이번이 처음 이었다. 우선 방호복을 입으면 열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어 20분 만에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얼굴만 노출되어 있는데 마스크와 고글을 쓰기 때문에 고글 안에 습기가 차고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가면 굉장히 따갑다. 눈을 만질 수도 없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두통이 생기거나 토하고 싶을 때도 있다. 너무 힘들어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환자 상태가 좋지 않으면 두고 갈 수 없으니 버텨야 한다. 초기에는 후원받은 의료 물품이 많다 보니 불량 제품도 있었다. 고글이 이마를 찌르기도 하고 방호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모서리에 옷이 찢길 때도 있고 특히 벗을 때가 위험한데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묻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감염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많은 의료진이 조금이라도 열이 나거나 몸이 좋지 않으면 혹시 감염된 게 아닌지 불안했다. 육체적 피로는 참고 견디면 되는데 이런 불안감이 의료진을 더 힘들게 한다. 내가 감염되면 내가 돌보는 환자와 가족, 동료 의료진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힘들었다.

의료진도 많이 지친 상황이었겠다. 그나마 나는 상황이 절반쯤 해결된 상태에서 투입되었다. 먼저 투입된 사람들은 사지를 왔다 갔다 했을 거다. 한 병원에서 1백여 명 넘게 감염되고, 일하던 간호사들도 감염되거나 격리되었기 때문에 기존 인력이 한 명도 없었다. 대체 인력이 모든 환자를 보살폈다. 국립정신건강센터를 비롯한 국가기관에서 파견 온 의료진이 병원에 도착해 환자의 팔에 매직으로 이름을 적어가며 관리했다. 활력 징후를 체크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정신과 병동이다 보니 환자의 배설물도 처리해야 했다. 상황이 호전되고 나서 다른 대형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기 시작했다. 보통 방호복을 입고 두 시간 정도 근무하는데, 이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너 시간을 연속해서 근무할 때도 있었다.

병원은 생사를 오가는 곳이다. 의료봉사 활동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청도 대남병원에 갔을 때 환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다.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고 기피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상황이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환자들의 순수한 진심이 느껴졌다.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 평소에 뭘 할 때 행복한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게 무엇 인지, 대화를 많이 했다. 농부였던 분도 있고, 벽돌 나르는 일을 하던 분도 있었다. 한용운과 김소월의 시를 좋아하는 분도, 일기를 쓰는 분도 있었다. 일기장을 보물 처럼 아끼던 분은 이송되면서 감염 위험 때문에 일기장을 폐기해야 한다는 말에 너무 속상해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분이 사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송되면서 의료진에게 계속 감사 인사를 전했고 격려도 해줬다. 비록 청도 대남병원에 일주일 밖에 있지 않았지만 환자 들과 주고받은 사소한 대화가 많은 감정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많은 분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안동의료원에서 일할 때는 환자 수가 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의료진의 노력과 후원하는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일을 잘해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봉화의 푸른요양원에서 다시 집단감염자들이 나왔을 때는 잠시 무력감이 들었다.

최근 상황은 나아지고 있는가? 중환자실은 여전히 힘들다. 게다가 의료봉사자들 임금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지만, 숙박비를 비롯한 체류 비용을 자비로 내고 있기 때문에 적금을 깨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의료진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빨리 실행되기를 바란다. 다행스러운 건 언론과 국민이 이 문제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