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주변도 둘러볼 새 없이 바쁘게 살던 ‘경진’이 모처럼 휴가를 맞았다. 계획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것. 그런데 의도와 달리 우연한 만남들이 그를 어딘가로 이끈다. 게다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경진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뒀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마치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라는 주문에 걸린 듯 기묘한 대화의 연속이다. 이렇게 듣게 된 모든 사람의 삶이 경진의 마음에 남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바쁜 일상에 쫓겨 지나쳤던 자신의 삶과 주변의 이야기를 돌아본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것,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 만나고 대화하기가 어려운 지금 더 간절한 이야기.

소설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는 제목이 곧 내용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이 모두 주인공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는 어떤 생각에서 시작된 건가요? 살면서 별거 아닌데 마음에 남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반대로 어두운 에너지가 남을 때도 있고요. 저는 전자의 마음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이에요. 이번 책은 가끔 대중교통이나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원래 알던 사람처럼 말을 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이 며칠 연이어 생기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상상으로 시작했어요. 낯선 사람과 나눈 우연한 대화에서 마음에 남는 것들을 생각하면서요.

구성은 판타지 같은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이에요. 장르를 뭐라 지칭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인 이야기에 판타지가 한 스푼 정도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시선은 조금 더 위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이건 실제로 제가 삶을 사는 태도이기도 해요. 아주 멀리 있는 이상을 향해서 직선으로 달리지는 못하지만, 한 스푼의 가능성을 보면서 살려고 하거든요.

왜 만나는 모든 사람이 경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추측해봤는데, 아마 경진이 좋은 청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없고, 개입하려 들지 않고, 무엇보다 모든 말을 세심하게 들어줘요. 경진을 좋은 청자로 만들려고 의도한 건 없어요. 사실 판단하지 않고 들어만 줘도 좋다는 건 어른이라면 누구나 아는 청자의 태도잖아요. 듣는 행위에 특별한 재주나 소질이 없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다들 이런 마음의 여유가 없을 만큼 바쁠 뿐이죠. 경진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고요. 다만 좋은 청자가 될 수 있는 특수한 기회를 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경진에게 투영한 자신의 모습이 있나요? 오히려 경진처럼 되고 싶은 쪽이에요. 제가 말하는 걸 좋아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얘기가 길어지거든요. 듣는 귀를 갖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굉장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단 한 명도 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어요.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도 없고요.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악인도 물론 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을 제 세계에 초대하고 싶진 않아요. 굳이 그 사람들의 얘기를전하는 스피커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 사람들 때문에 괴롭고 지친 사람들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들어주자는 게 제 기조예요.

친구, 엄마, 처음 보는 이들의 얘기는 다 있는데 정작 경진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과외 학생 ‘해미’의 이야기는 ‘나에게 얘기해보라’는 말로 끝나요. 해미가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아까 말한 한 스푼의 판타지처럼 결말도 확 열린 게 아니라 살짝 열어둔 거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얘기를 했겠지’라고 짐작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 느낌이 맞아요. 결말 없는 결말이라고 하는 분도 있지만, 해미의 이야기는 가늠할 만한 건 다 넣어놨다고 생각해요.

전작 <애주가의 결심>이나 <마냥, 슬슬>을 읽은 사람이라면 눈치채겠지만, 이 책에도 대화 안에서 술이 매개체가 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이번에는 최대한 조금 쓰려고 하긴 했는데, 편집자는 아예 시그니처로 가져가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주인공이 30대 여성인데, 그 정도 나이의 사람들이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땐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떤 술과 함께하면 좋을까요? 다 읽은 후에 쓴맛이 남지 않는, 가뿐한 느낌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카바처럼 가볍고 상큼한 술이면 어떨까요. 가격도 맛도 보디감도 부담스럽지 않은 술이잖아요.

작가의 말을 짧은 한 문장으로 남겼어요. ‘햇살이 드리운 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얼굴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처음엔 작가의 말을 안 쓸까 싶었어요. 이미 경진이 많은 얘기를 들었고, 이제 해미의 얘기를 듣겠다는 말로 끝났으니, 이제 그들의 대화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고 책장을 덮는 게 좋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런데 편집자가 짧게라도 있는 게 좋겠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압축해서 적었어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매개체는 대화인 것 같아요. 그러니 이 책을 통해 모두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마음으로 적은 말이에요.

책의 제목만큼 필명도 기억에 남는다는 반응이 많아요. 은모든이라는 이름은 언제 지은 건가요? 제가 습작생 시절이 길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꿈은 작가였는데 본격적인 습작은 대학생 때부터 했으니까 비교적 긴 시간이었죠. 그 시간이 길어지면 누구나 이런저런 이름으로 글을 내보거든요. 저도 낼 때마다 다른 필명을 생각하다 나온 이름이에요. 만든 필명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았거든요.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특별한 뜻은 없어요.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의 주인공 경진도 대회 같은 단어를 붙여 경진대회라고 쓸 수 있는 이름이잖아요. 그런 걸 선호해요. ‘모든’도 문장이나 단어에 활용할 수 있거든요. 다들 단번에 기억할 수 있다고 해서 기뻐했는데, 검색어에 자꾸 ‘~은 모든 문제를 안고’ 같은 말에 걸린다는 단점도 있더라고요.(웃음)

긴 습작생 시간은 어떻게 버텨냈나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차피 나는 평생 글을 쓸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지금 작가를 꿈꾸는 분이 이 인터뷰를 읽고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꾸준히 내 글을 봐주고 장점을 얘기해주는 동료가 큰 힘이 될 거예요. 그 사람의 존재가 나아갈 힘이 되어주거든요. 주변에서 ‘왜 이렇게
안 될까’라는 말만 듣다 보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쉬워요.

무엇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나요? 사람들요. 더 다양한 만나고 싶어요. 글은 집에서 쓰는데, 글을 쓰기 위한 에너지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얻어요. 그 사람의 말에서 글감을 얻기도 하고요. 최근에 어떤 회사 법무 팀의 변호사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주 특색 있고 탐나는 캐릭터더라고요. 그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경진은 이 휴가를 좋은 휴가로 기억할까요? 결국 바라는 대로 쉬진 못했는데요. 그래도 중반 이후부터는 만남의 강도가 느슨해졌고, 또 엄마와 대화하며 내내 마음을 눌렀던 돌 하나를 내려놓았으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가뿐할 거예요. 다만 다음 휴가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쉬기도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