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마치 여름 같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서로 상처를 주고 싸우면서도 밤이 되면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려 부둥켜안는다. 계절은 돌고 돈다. 시간을 쌓으며 이들의 관계도 성장하고 변화한다. 작지만 힘이 느껴지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남매를 통해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남매인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가 방학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 댁에서 머무르며 시작된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모(박현영)까지 합세하면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여름밤의 기억을 관객과 함께 나눈다.

<남매의 여름밤>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각종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고 있다.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첫 영화제에서 수상해서 더 뜻깊다. 어쩌면 주목받지 못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여러 상을 받았다. 이 힘으로 영화를 계속 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관객의 호응 또한 감독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 상영 후 기억에 남는 관객의 피드백이 있는가? 관객과의 대화(GV)가 끝난 뒤 울면서 나를 안아주고 간 분들이 있었다. 온전히 내 작품을 위해 시간을 내어준 관객을 현장에서 만나는 경험은 처음이라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중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한 피드백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관객의 한 사람이 되어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영화가 참 단정하고 좋다’였다.(웃음) 내 모든 걸 쏟아 부어 만들었기 때문에 아쉬운 감정은 없었다. 단지 내 손을 떠난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들어 새벽에 혼자 해운대를 서성이기도 했다.(웃음) 외국의 영화평론가들이 에드워드 양의 영화가 생각난다고 했을 때도 무척 놀랐다.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화를 참고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평소 영화를 보거나 만들 때 인물이나 사건이 극적이면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살면서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 또 어떻게 영화의 결이 바뀔지 모르지만.

8월 개봉 후 일주일 만에 관객 1만 명을 돌파했다. 나는 영화를 보자마자 남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꼭 봐야 한다’고.(웃음) 어떤 점이 관객의 마음을 끈 것 같은가? 남동생에게 추천했다니 고맙다. 관객이 한 명 추가된 셈이다.(웃음)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사적인 이야기일수록 감정은 보편적으로 전달된다고 느꼈다.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게 되는 지점을 좋게 봐준 것 같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는 반응도 많았다. 장르영화는 “잘 봤다!” 하고 끝날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난 후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거나 어떤 잔상이 남는 것, 이런 부분에서 호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족 이야기를 첫 장편의 소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의 단편들도 가족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스스로 돌아봤을 때 ‘정말 솔직하게 작업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다루기로 했다. 늘 ‘왜 영화는 항상 슈퍼히어로나 영웅이 주인공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좋지만, 나와 같은 인물이 등장해 그의 소소한 삶에서 위안을 받을 수도 있지 않나.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물을 만들고 어떤 인물의 선택을 너무 악하게 그리거나 너무 착하게 미화하지 않으려고 했다. 전형적인 대사보다는 오직 이 인물만이 할 수 있을 법한 대사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나와 같은 인물의 삶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남동생은 아들이고 막내라서 부모님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한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아빠가 누나 옥주의 쌍꺼풀 수술은 단칼에 일축하면서 남동생 동주의 스마트폰은 빈말이라도 사준다고 하지 않나.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웃음) 그리고 이건 실제 남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남자 형제가 없다.(웃음) 일단 가장 큰 틀은 아빠와 남매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진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남매에게 어떤 사연이 있고, 어떤 일을 겪을지 생각하면서 장면을 채워갔다. 그 사이에서 성인 남매(아빠와 고모)와 어린 남매(옥주와 동주)의 대비되거나 비슷한 지점을 만들었다. 영화 중간에 고모 역시 집에서 둘째이자 딸이라서 오빠에게 양보해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옥주는 첫째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아빠는 옥주가 철이 들었으니 이해하겠거니 생각하고 동생에게 더 잘해주는 모습을 보이니까. 이런 가족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자매나 형제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남매라는 관계에 주목한 이유가 있는가? 남매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더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매라면 동질감을 느껴 연대하기 쉬울 테니까. 그래서 동주가 옥주를 쫓아다니며 뭐든 같이 하고 싶어 하는 때가 딱 이 시기밖에 없겠다 싶었다. 관계 내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는 대비의 순간들을 포착하려 남매로 설정했다.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은 총 5명이지만, 이야기는 옥주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사춘기인 옥주의 감정 폭이 가장 클 것 같았다. 자신의 성숙과 미성숙,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에 대한 생각 등을 바탕으로 옥주가 관찰자가 되었을 때 이 가족을 최대한 편견 없이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옥주 캐릭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화자로 택했다.

배우들과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나? 옥주 역을 맡은 최정운 배우에게는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는지, 옥주 나이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주 역의 박승준 배우와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현장에서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역 배우의 전형적인 연기가 나오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으려 애썼다.

실제 가족 같은 자연스러운 장면들 덕에 배우들의 애드리브가 많았을거라 추측했다. 배우들에게 연기를 하다 대사와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렇게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대사에 매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옥주와 아빠가 싸울 때도 화가 나서 뛰쳐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뛰쳐나갈 정도의 감정이 아니라면 그냥 거기 있으라고 했다. 할아버지 생신 파티 장면에서는 동주가 춤을 출 때 아빠가 “이런 건 어디 가서 하면 안 되겠다” 하고 말한 것도 양흥주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옥주와 동주가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실제로 박승준 배우가 최정운 배우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 촬영하면서 그새 유대감이 쌓인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우연들을 포착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야말로 웃고 울었다. 영화 곳곳에 적절히 섞은 유머가 인상적이다.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서 관객이 웃은 경우도 많다. 나는 이런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옆집 아주머니가 남편과 싸웠는데 이유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이었다거나 진지한 분위기의 장례식장에서 양말에 난 구멍을 발견한다든가 하는. 우리 영화에서는 고모가 고모부와 싸운 뒤 할아버지 집에 찾아온 남편에게 소금을 뿌리지 않나.(웃음) 이렇듯 삶은 항상 무겁거나 항상 자극적이지만도 않다. 정형화되지 않은 감정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어야 이야기가 좀 더 사실처럼 다가오고 인물들이 실재하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에는 유머뿐 아니라 균열과 부재도 존재한다. 엄마의 부재, 성인 남매의 이혼, 할아버지와의 이별 같은. 이런 결핍은 각자의 꿈으로 채워진다. 이를테면 옥주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 꿈을 꾼다. 꿈과 기억이 혼재될 때가 있다. ‘어제 꾼 꿈이 내가 예전에 겪었던 일인가?’ 하고 혼동하기도 한다. 꿈과 기억은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하는 도구이자 노스
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다. 설령 기억이 아닌 꿈일지라도 그 감정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은 미화하거나 무언가를 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니까. 그래서 꿈을 통해서라도 비극이나 상실의 순간이 너무 차갑거나 냉정하게만 보이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이 영화가 ‘부재’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애도의 영화로 비쳤으면 했다. 아니, 그보다 내가 이 영
화를 찍을 때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다.

남매가 상실을 겪지만 영화가 전반적으로 따스하게 느껴진 이유는 2층 양옥집이라는 공간의 역할도 크다. 2층 양옥집은 배우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다. 처음부터 이층집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과거에는 잘살았을 법한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집을 발견했고 시간을 들여 섭외했다. 구옥이 주는 안온함, 어쩌면 비효율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 영화 속 가족들이 모여 생활하는 시간만큼은 행복하길 바랐다.

작품 곳곳에 ‘공간’에 대한 감독의 진지한 고민이 드러난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공간들을 세세하게 비추며 끝이 난다. 공간의 느낌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했다. 남매가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 가는 오프닝 테이크가 긴 이유도 사실감을 주기 위함이다. 골목과 도로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골목에서 나와 도로로, 그리고 다시 터널을 통과해 할아버지 집이 있는 외곽으로 간다는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집 마당의 텃밭에서 느껴지는 여름날의 생기, 2층 양옥집이 주는 안온함 등 각 공간이 가진 특징이 인물의 감정이나 영화적 요소를 대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소파살이(?)를 계속 보여주는 것도, 공간에서 사람이 떠나더라도 그 시간이 여전히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 함께한 시간이 공간에 깃든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즐겨 듣는 김추자의 ‘미련’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노랫말 자체가 영화를 관통하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고, 할아버지가 실제로 들을 법한 음악이었다. 음악을 직접 만들어볼까 고민했는데 그 시대의 악기나 음색 같은 건 2층 양옥집처럼 구현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 따라 원곡을 사용했다.

훗날 지금을 돌아볼 때 <남매의 여름밤>은 윤단비 감독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삶에서 한 분기점을 지난 기분이다. 영화가 내 필모그래피 속 한 작품으로만 여겨지는 게 아니라, 나도 그 시절을 그 가족과 함께 산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잘되기보다는 영화 자체를 응원하게 된다. 내가 연출을 잘해서 영화가 사랑받는다기보다는 ‘이 영화가 잘 자라 상도 받고 참 대견하다!’ 하고 생각하
게 된달까? 그런데 아빠가 이 말을 듣고 “영화가 잘되면 네가 잘되는 거지 뭐” 라고 하시더라.(웃음)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이 영화가 가는 길을 내가 지지하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건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마음일 것 같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단 한 번도 영화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영화는 내 삶의 이유이고, 삶을 지탱하는 어떤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영화도 만들겠지만, 영화 작업은 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영화 외에는 이렇게까지 매달린 것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 영화의 흐름에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작품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영화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랄까? 이건 갑자기 너무 대의적인 포부인가?(웃음)

유의미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신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법한 작품은 만들고 싶지 않다. 이건 관객뿐 아니라 배우나 스태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그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거나 극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영화로 만들기 좋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서사라면 피하거나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윤단비 감독의 다음 작품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처럼 아이들이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성장의 서사를 다뤄보고 싶다. 아, 아니다. 의외로 현실적인 멜로드라마가 될지도 모른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