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난 묵직한 돈 가방 하나.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자신의 삶을 구제해줄 그 돈 가방을 쟁취하기 위해 짐승이 되어가는 이들의 여정 혹은 투쟁을 그린다. 절망은 절박함을 만들고, 절박함 속에서 만난 지푸라기는 욕망을 분출시킨다. 절망 앞에서, 돈 앞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이들이 좇는 것은 희망일까, 또 다른 비극일까. 김용훈 감독이 첫 영화를 통해 세상에 내놓은 질문의 조각들.

안타까운 말이긴 하지만,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올해 가장 흥행했을 작품으로 자주 언급된다. 개봉 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으로 기대감이 높기도 했고. 사실 밝은 영화가 아닌 데다 이야기 자체가 무거워 흥행을 기대하진 않았다. 청소년 관람 불가이기도하고. 다만 투자한 사람들이 아쉽지 않게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는데, 아쉽다. 그래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 다녀온 게 큰 추억이자 위로가 된 것 같다. 거기선 상영 때 객석이 꽉 찼었다. 가기 전엔 외국 관객이 한국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는데, 내 의도가 잘 전달된 느낌을 받아서 되게 신났었다. 관계자들이 가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 가기 전에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 가서는 상도 받고 관객 반응도 좋다 보니까 기운이 가득 차서 온 거다. 그런데 돌아왔더니 그때부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됐고. 언론 배급 시사회가 끝나고 평일 낮 시간에 관객의 반응을 살피려고 영화관에 간 적이 있는데, 혼자 봤다.(웃음) 과정이 되게 드라마틱하지 않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다. 영화 본다고 굿즈도 주더라.(웃음) 다 받아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소네 게이스케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우연히 서점에서 제목에 끌려 산 책인데,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끝까지 한 번에 봤다. 읽자마자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타임테이블이 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까, 이걸 영상으로 바꿨을 때 관객을 속이는 게 가능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원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써봤는데,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다음부터 영화로 만들어보려고 제작자, 투자자랑 얘기를 시작했다.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사실 원제가 워낙 강렬해서 다른 걸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반응이 극명하게 나뉜다. 이 제목을 좋아하는 사람은 되게 좋아하는데 반대로 너무 길어서 별로라는 반응도 있었다. 상업성이 덜하다는 거다.

보통 흥행하는 상업 영화는 제목이 두세 자로 간결하니까. 맞다. 그런데 나는 그런 클리셰를 따르기보다 긴 제목으로 가고 싶었다. 또 영화에 워낙 훌륭한 배우들이 등장하니까, 이 제목을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영화를 총 6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영화보단 소설에서 자주 쓰는 방식이다. 장을 뺀 버전도 있는데, 마무리 편집을 할 때 결국 장을 만들기로 했다. 어차피 원작이 소설이기도 하고, 장을 나눔으로써 전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 후반에는 시간이 뒤틀리는 구조를 띠는데, 장이 넘어갈 때 이런 재미가 배가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전도연 배우를 비롯해 정우성, 윤여정, 배성우 등 배우 라인업이 굉장히 화려하다.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전도연 선배님이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봤고, 가장 먼저 출연 결정을 해줘서 캐스팅 과정이 생각보다 수월했다. 심지어 윤여정 선배님과 정우성 선배님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직접 전화도 걸어주고, 전반적으로 캐스팅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렇지만 그만큼 현장에서 디렉팅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어렵기보다 재미있게 작업한 기억이 더 많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준비해온 걸 보고 거기에 내 해석을 얹어 시도해보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내가 제안한 부분을 다들 편안하게 받아줬다. 긴장했던 적은 있지만 같이 작업하면서 소통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가장 긴장한 순간은 언제인가? 전도연 선배님 첫 촬영 때. 폐차장 신을 찍는 날이었는데, 촬영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기였다. 나도 스태프들도 현장에 어느 정도 적응돼 있었는데도, 마치 그날 크랭크인 하는 것 같았다.(웃음) 전도연 선배님은 등장만으로도 그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이다. 나름 단단히 준비를 했는데도 엄청 긴장했다. 그런데 첫 장면을 찍으면서 그게 탁 풀렸다. 차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었는데, 선배님이 걷기 시작하자 뒤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장면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걷는 것만으로도 ‘연희’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와, 이래서 전도연, 전도연 하는구나’ 싶었다. 그 이후부터는 긴장감이 기대감이 되고, 재미가 되면서 편하게 찍었다.

 

“이 영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할 때
내 마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
그 자체였다.”

 

영화를 만들면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블랙코미디의 느낌을 주려고 했다. 나는 이 영화가 웃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보니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 영화지만, 반대로 나는 그 긴장 속에서 웃음이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처럼 엄숙한 상황에서 어떤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지면 그걸 못 참지 않나.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 만들면서 그런 뉘앙스를 많이 생각했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이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인데,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이제 끔찍한 장면이 나오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딱 거기까지만 나오고 만다. 사실 때리고 맞는 장면을 많이 찍었다. 심지어 굉장히 고통스럽게. 그런데 개봉 전 모니터 사회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관객이 너무 힘들어하더라. 특히 여성 관객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을 바꾸게 됐다. 가정 폭력을 당하는 ‘미란’(신현빈)을 예로 들면 머리채를 잡혀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만으로도 이 사람의 상황이 느껴지겠구나 싶어서 이후의 신을 걷어냈다. 힘들게 찍은 장면이라 아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성 캐릭터는 소모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노모,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내, 화류계 여성이 등장한다. 자칫 뻔해 보일 수 있는 이 캐릭터들에게 어떤 서사를 부여하려고 했나? 나는 연희가 그걸 많이 뒤집어놓는다는 생각을 했다. 연희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돈에 물린 짐승들 가운데 가장 상위의 포식자다. 보통 누아르 장르는 남성 서사가 많고 여성은 주로 서브로만 존재하는데, 이걸 뒤집을 수 있는 캐릭터가 여성이라면 더 신선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외에는 성의 개념으로 캐릭터를 구분하진 않았다. 모두 주체적인 인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전반적으로 남자들이 좀 바보 같은 면모를 갖고 있긴 하다.(웃음)

영화 속 인물들이 잡고 싶어 하는 지푸라기는 결국 돈이다. 그런데 금액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진 않았다. 5억원이다. 아마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런데 미란도, 태영(정우성)도, 중만(배성우)도 모두 전에는 각자의 삶을 그럭저럭 잘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다 각자 특정 사건으로 무너졌고, 거기서 원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한다. 그래서 5억이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수백억이나 수천억이 아니라, 이거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금액으로.

영화를 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순간이 있었나? 이 영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할 때 내 마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 그 자체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다큐멘터리를 한 편 찍고 나서 어쩌다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서도 영화를 다루는 일을 하긴 했지만, 나는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는 내내 가족과 회사 사람들한테 딱 10년 다닌 뒤에 그만두고 영화 할 거라는 말을 계속 했다. 아마 다들 그런가 보다 했을 거다.(웃음) 그런데 진짜 입사한 지 10년 후 서른다섯 살에 사표를 냈고, 시나리오 몇 개를 썼다. 그중 하나가 이 영화다. 사실 그다지 상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서 ‘이게 될까?’ 싶었는데, 그때 전도연 선배님이 내게 지푸라기가 되어줬다.

지푸라기 이상의 것을 잡은 것 같다.(웃음) 맞다. 잡고 보니 금줄이었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는 느낌이 드나? 확실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서른 여덟에 입봉을 했으니까 30년 가까이 꾸던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막상 감독이 되고 나니까 막막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다음엔 뭘 해야 하나 싶고. 이제 어떤 감독이 되어야 할지 생각할 시기인 것 같다.

어떤 감독이 되고 싶나?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만, 확실히 좋아하는 건 있다. 그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랑 좀 비슷한 것 같다. 취향이 명확한 편이라 앞으로도 이런 기조로 갈 것 같은데, 언젠가 새로운 도전을 해볼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고민 중이다. 다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처럼 자신만의 세계관을 이어가고 싶은 욕심은 있다.

첫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다양한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그러면서 한 꺼풀 벗은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닥쳤을 때 노심초사했는데, 이제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또 모른다. 지금은 집에만 있으니까 그렇지, 막상 일이 닥치면 또 담배 피우면서 초조해할지도.(웃음)

처음이라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또 어떤 의미로 남을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 번 보여줬다는 것. 나는 이런 걸 이렇게 풀어내는 걸 좋아하는데,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같이 즐기자는 말을 처음으로 건네본 것. 그 사람들이 내 영화와 다음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