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MANNO SCERVINO

가끔 에디터가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쇼를 감상할 때가 있다. 그 편이 마음이 편할 때도, 더 즐거울 때도 있다. 에르마노 설비노는 후자에 가까웠다. 통통한 내가 입어도 멋스러울 것 같은 레오퍼드 무늬 코트, 조명에 반짝거리는 금사가 더해진 체크무늬 수트,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입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것 같은 더블브레스트 코트, 모두 개인적으로 갖고 싶었던 룩이다. 에르마노 설비노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스타일을 하나의 컬렉션으로 정리해 보여줬다. 평소라면 작은 움직임에도 과하게 반응하는 부드러운 퍼나 도저히 휴대폰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스팽글을 아낌없이 사용했겠지만 에르마노 설비노는 선수다. 가장 담백한 방식으로, 가장 잘하는 걸 보여줬다. 에디터의 입장에서 지루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객에겐 이보다 즐거운 일이 없을 것. 20주년을 기념하는 아주 똑똑한 방법이다.

DROME

1968년 출판된 마크 아탈리의 사진집, <Les Erotiques du Regard> (직역하자면 음‘ 흉한 시선’ 정도)의 표지는 꽤 유명하다. 속옷을 입지 않고 얇은 카디건을 입은 여자의 가슴을 클로즈업한 사진. 마리안나 로사티는 드로메만의 여성성을 확립하는 여정에서 이 책을 만났다. 여체를 살포시 감싸는 얇은 니트, 허벅지를 반 이상 드러내는 짧은 치마와 얇은 니삭스는 모두 이 사진집이 담아낸 시‘ 선’ 중 하나다. 드로메는 여기에 힘을 더했다. 테일러드 팬츠와 카디건을 더한 룩에 짙은 갈색 가죽 재킷을 매치했고, 교복 스커트와 가죽 톱을 매치한 룩의 밸런스는 크롭트 재킷으로 잡았다. 섹시하지만 강인한 룩. 연약해 보일 수 있는 니트에 거친 가죽을 매치하는 노련함. 브랜드의 정체성은 잃지 않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영리함. 밀라노의 신예, 마리안나 로사티는 머지않아 밀라노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을 것이다.

GIORGIO ARMANI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국내에 코로나19의 감염 확진자는 불과 30명 정도였다. 밀라노엔 단 한 명의 확진자도 없었다. 하지만 밀라노 패션위크가 진행되는 닷새 사이 세상이 변했다. 한국엔 하루에 1백 명 단위로 확진자가 증가했고 이탈리아는 이를 매일 속보로 다뤘다. 일정 마지막 날, 밀라노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속보를 전달받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결국 게스트 없이 쇼를 진행했다. 쇼의 후반부엔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아카이브 피스 12벌을 선보였다. 2009년과 2019년 봄 시즌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었다. 그 누구보다 큰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조국에 보내는 작은 응원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평상시처럼 조용히 걸어 나와 손님들 자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새‘ 로운 평범함(New Normal)’이라 불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 삶의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도, 간절하게 바라본다.

ANTONIO MARRAS

안토니오 마라스 쇼엔 늘 동화적인 서사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시즌에는 디자이너의 오랜 뮤즈이자 스승, 마리아 라이(Maria Lai)가 컬렉션의 핵심 요소를 제공했다. 실을 엮어 경이로운 작품을 만든 마리아 라이 그리고 실을 꿴 룩으로 매 시즌 컬렉션을 완성하는 안토니오 마라스. 누구보다 특별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둘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요정에 관한 것. 안토니오 마라스는 이번 시즌, 마리아 라이의 요정을 자신의 고향 런던으로 데려갔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1980년대 런던. 고스, 펑크, 로맨티시스트가 공존하던 격변의 시대. 그물 스타킹, 러플 드레스, 타탄체크, 버클 부츠와 비비안 웨스트우드 식으로 스타일링한 데님 점프수트엔 모두 스승의 작품을 새겨 넣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다. 마리아와 안토니오가 함께 있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마리아 라이는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이 마음을 맞대고 완성한 전시는 아직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에 위치한 국립 중세 근대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ALBERTA FERRETTI

시대의 흐름을 읽는 건 중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패션에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트렌드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알베르타페레티 급의 디자이너는 이를 깔끔히무시해도 좋다. 알베르타 페레티만이 할 수 있는 것, 브랜드가 갖고 있는 강점을 매 시즌 업그레이드하기만해도 성공이 보장될 테니까. 알베르타페레티는 이번 시즌, 트렌드라는 흐름에 몸을 싣기로 결정한 듯했다. 1980년대 스타일의 오버사이즈 재킷에 플리츠 팬츠를 매치한 수트, 볼드한 골드 주얼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본 옷으로 차려입은 모델들은 센‘ 언니’ 포스가 넘쳐흘렀다. 알베르타 페레티 식의 데이웨어에 반기를 들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강점인 이브닝 웨어에 더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하디 과한 러플 드레스, 크리스털을 촘촘하게 장식한 오간자 드레스는 뼛속까지‘페레티!’를 말하고 있었다. 메탈릭 실버미니드레스, 넉넉한 핏의 가죽 플리츠팬츠도 예쁘긴 하지만 이자벨 마랑이나 베르사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룩이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조금 뻔하더라도 다음 시즌에는 고전적인 알베르타 페레티의 옷을 보고 싶다.

GCDS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시즌 GCDS 컬렉션은 눈 둘 곳을 찾기 힘들어 고통스러웠다. 일본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줄리아노는 곰 인형 비키니와 성인 만화물을 프린트한 드레스를 선보였다. 이번 시즌 그는 정신을 다잡은 듯했다. 과장을 보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하늘색 새틴 블레이저와 크리스털 스트랩 비키니 톱, 보이프렌드 데님과 롱부츠의 조합은 1990년대 팝 스타를 연상케 했다. 짧은 치파오, PVC 소재의 티어드 스커트는 남들의 시선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도전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근간의 GCDS 컬렉션에 비하면 이번 시즌 룩은 모두 심의 규정을 준수했다. 물론 2019 S/S 시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슴 세 개 달린 여신상을 쇼장에 세우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받아줄 수 있다.

SPORTMAX

스포트막스 쇼에서 확실하게 보고 갈 수 있는 것. 잘 재단된 롱 코트, 가죽 베스트, 휴가를 떠날 때 꼭 챙기고 싶은 맥시 드레스. 그라치아 말라골리는 이번 시즌 퓨처리즘에서 영감을 받았다. 1990년대 스타일로 눈두덩 전체에 은빛 아이섀도를 바른 메이크업, 귀가 뾰족하게 드러나도록 스타일링한 머리는 스포트막스에서 볼 수 없었던 뷰티 룩이다. 다행히(?) 옷은 안전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고상해 보일 수 있는 니트 플리츠 드레스에 강인한 인상을 더해준 가죽 베스트, 간결한 니트 투피스와 긴 장갑을 매치한 룩은 스포트막스 식 럭셔리가 분명했다. 컬렉션 후반에 등장한 퓨처리스틱한 룩은 1990년대 개봉했던 공상과학영화의 코스튬처럼 우스꽝스러웠다. 특히 실버 보까지 더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장식 벨벳 턱시도 수트는 데이비드 보위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MILIO PUCCI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은 여러 가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교체하거나 지난날 토즈, 베르사체 그리고 현재의 몽클레르처럼 ‘게스트 디자이너’를 들이는 것. 에밀리오 푸치는 앞으로 몇 시즌 동안 젊은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을 맡기겠다 발표했다. 첫 번째 주자는 코셰(Koch )의 크리스텔 코셰. 농도 짙은 컬러와 현란한 프린트가 시그니처인 에밀리오 푸치는 섹시하고 진취적인 여성복을 만들곤 했다. 몸에 꽉 맞는 수트, 데콜테 라인이 드러나는 블라우스, 마이크로미니 드레스와 보태니컬 프린트 파자마 수트가 하우스를 대표했다. 코셰는 여기에 스트리트 감성을 더했다. 에밀리오 푸치 특유의 페이즐리 프린트는 티셔츠와 레이스 스커트에 더해졌고, 미니드레스는 캐주얼한 폴로 드레스로 재해석됐다. 브랜드의 스테디셀러인 트윌리 스카프는 블랙 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다리에 가터벨트처럼 연출됐다. 에밀리오 푸치의 고객 평균 연령을 열 살 정도 낮출 수 있는 컬렉션임은 분명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코셰 같지도, 그렇다고 에밀리오 푸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는 거다.

PORTS 1961

패션위크 일정 마지막 날 첫 쇼를 관람하는 건 늘 힘들다. 그래서 밀라노 디자이너들은 최고의 에스프레소를 내어주곤 한다. 하지만 에디터의 잠을 깨운 건 에스프레소가 아닌 컬렉션이었다. 내년에 60주년을 맞는 포츠 1961은 지난 9월, 유명 스타일리스트이자 <인터뷰> 매거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템플러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했다. 신선한 뉴스였다. 컬렉션은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칼 템플러의 포츠 1961은 현란했다. 변형한 피셔맨 니트, 동그란 실루엣의 코쿤 케이프, 드레이프 드레스처럼 클래식에 기반을 둔 룩에 과한 요소가 더해졌다. 지나치게 크고 선명한 장미 프린트, 출처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초상, 볼드한 체인 목걸이와 커다란 드롭 이어링이 한데 어우러졌다. 게다가 거의 모든 룩에 커다란 실크 스카프를 매치했다. 모두 분리한다면 매혹적일 수 있겠지만 칼 템플러의 스타일링은 그렇지 못했다. 쇼를 살린 슈퍼히어로는 카이아 거버. 그녀가 입은 흰색 파이핑 드레이프 드레스는 포츠 1961 그 자체이면서도 새로웠다. 지난날의 포츠 1961이 그리워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