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종, 랩 셔츠, 울 와이드 팬츠 모두 코스(COS).

<인간수업>의 고등학생 ‘오지수’는 돈을 벌기 위해 범죄의 길에 들어서지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학원에 다니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 취직하고 싶을 뿐이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무엇이, 그리고 왜 잘못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수는 연이어 잘못된 선택을 한다. 배우 김동희는 악의적인 인물에게 동정심을 거두고 다만 상황에 빠져 지수를 연기했다. 문득 벽에 부딪히고 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시간을 지나 때론 자신도 몰랐던 얼굴을 발견하며 <인간수업>을 마쳤다.

오디션을 통해 <인간수업>의 지수 역을 맡게 되었다. <에이틴 2>를 한창 촬영하고 있을 때 <인간수업> 오디션 소식을 들었다. 두 줄 정도의 대사를 연기해 영상으로 보내는 오디션이었다. 분량은 15초 정도. ‘내 꿈은 비싸다. 내 꿈은 졸업하기, 대학 가기, 취직하기’라는 대사였다. 짧은 시간 안에 연기를 보여줘야 해서 여러 상황을 설정해서 연기했다. 앞뒤 맥락을 모르는 만큼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대사였다. 꿈의 가격을 정해놓다니,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호기심이 생겼다.

시나리오 속 지수의 첫인상은 어땠나? 인물 자체보다는 대본이 주는 힘이 컸다. 진한새 작가님의 대본은 지문이 엄청 많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해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찾아본 다른 시나리오와 비교해도 지문이 무척 길었다. 한 사람의 대사가 세 쪽을 넘은 적도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가령 소리를 지를 때도 사‘ 자가 포효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지수’ 이런식이다. 머릿속으로는 상상이 되는데 실제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고 그런 점이 재미있었다.

지수는 계속 옳지 못한 선택을 한다. 윤리적으로 틀렸지만 배우로서는 연기를 위해 이해해야 한다.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겠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더 이상 이해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지수는 용서받으면 안 되는 인물인데 연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안타깝게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점이 연기하며 가장 어려웠다. 지수는 불행한 인물이지만 불쌍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연기하면서 감정을 소진하는 작품이었을 것 같다. 다행히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다. 촬영하고 다음 날이면 잊기도 하고 그런다. 감정을 쌓아두기보다는 순간순간 지수의 감정 상태로 나를 던져 내 안에서 나오는 대로 연기하려고 했다. 김진민 감독님이 그렇게 연기할 수 있도록 현장을 만들어주신 덕분에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우는 연기를 할 때 풀 숏과 바스트 숏, 클로즈업 숏에서 에너지를 100% 쏟아냈다. 그렇게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한번 터진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연기하며 마음을 다치진 않았지만 힘들었다.

대본에 적혀 있지 않은 인물의 과거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는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연기할 인물이 태어난 순간부터 적어본다. 엄마가 낳은 순간부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이런 식으로 매년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상상한다. 한 줄이라도 써가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극 중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람은 관계에 따라 성격이 변하고 말투가 달라지니까.

플립 셔츠 질샌더(Jil Sander).

오버사이즈 셔츠, 크롭트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가방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김동희를 대중에게 알린 작품은 <SKY캐슬>이다. 두 작품의 캐릭터 모두 같은 고등학생으로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목표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는 점이 닮았다. 그래서 힘들었다. 결이 다소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지수도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 없어 보이니 대본을 읽다 보면 <SKY캐슬>의 서‘ 준’과 말투가 비슷해졌다. 그래서 다르게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인간수업>이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부문 1위에 올랐다. 첫 주연작이 좋은 반응을 얻어 의미가 클 것 같다. 배우로서 첫 단추, 첫 계단인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김진민 감독님을 만나 처음 느낀 순간이 많았고, 상황에 나를 던지며 연기했다. 감독님의 연기 디렉션이 마치 고등학교와 대학교 연기 수업 때 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 같았다. 자의식을 버리고 완전히 이입해서 상황에 빠져드는 것,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막 필모그래피를 쌓기 시작했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연기하는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오나? 연기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입시 때 이후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 나는 연기에 충분히 빠져 있다는 거다. 연기는 힘들다. 할수록 부족한 점만 보인다. 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은 재미있다. 그리고 배우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연기란 결국 글을 보고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글을 잘 분석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김진민 감독님이 항상 세상을 볼 줄 알아야 연기가 는다고 말씀하셨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게 있어야 하고, 사회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그런 관심을 동력 삼아 많이 배워야 하고, 지금보다 더 공부하라는 말씀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공부가 있다면? 사소한 것이 많다. 책도 많이 읽고. 요즘은 소설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소설책을 읽는다. 부족한 상상력이 채워진다고 할까. 최근에는 한 촬영감독님이 추천한 <환상의 빛>을 읽었다.

<인간수업>과 <이태원 클라쓰>를 마친 후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차분한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잠시 멈춰 돌이켜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무엇인가? 반성. 좀 더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고,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회피한 순간이 많았다. 벽이 놓였을 때 부딪는 대신 피한 것 같다. ‘레디, 액션’으로 시작되는 장면은 길어 봤자 5분 안에 끝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때론 더 과감하게 해보고 싶은 연기를 했어야 하는데 생각을 묵혀둘 때가 있었다. 좀 더 자신감 있게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다음 작품까지 쉬는 동안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보내겠다. 채우고 싶은 것이 많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했다. 한 작품을 끝내자마자 다음 작품을 준비했기 때문에 지난 내 연기를 되돌아볼 새가 없었다. 어떤 작품이든 휴대폰에 연기 노트를 만들어놓는다. 촬영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날 떠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이 해준 얘기를 매일 적는다.

마지막으로 메모장에 적은 내용은 뭔가? 며칠 전 김진민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다 <인간수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내가 기여하는 부분은 1%도 되지 않고 모두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것이며, 요즘 배우로서 문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는 점을 얘기했다. 어떻게 헤쳐나가고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으니 감독님이 절대 ‘쫄지’ 말라고 했다.

왜 문득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걸까? 아는 게 많아져 그런 게 아닐까? 현실을 좀 더 직시하게 됐다. 나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오가고, 그걸 보면서 무너졌다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좋게 평가해주어도 나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나는 만족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나쁘게 평가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연기에 대해 스스로 객관적으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연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이 없어지고 막막할 때가 있다. 어떻게 헤쳐나갈지 잘 몰라 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처음에는 ‘그냥 한번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덤비던 멋모르던 시절의 패기가 좀 없어졌다. 현장을 알고 나서 그렇게 된 것 같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동료, 선후배 배우들을 비롯해 스태프들과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현장 분위기를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쉬는 동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 전에 본가에서 기타를 가져왔다. 오랜만에 쳐봤는데 잘 안 되더라. 엄마가 기타 학원에 쓴 돈이 아깝다고 했다.(웃음) 그래도 다시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영어 공부도 하고. 배우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올해는 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답을 찾고 싶고. 아, 너무 어렵다.

지난번에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어느 장르에나 어울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생각은 변함없나? 없다. 더불어 떳떳하고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아이가 생기면 ‘아빠처럼 되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