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톱 코스(COS), 네크리스 먼데이에디션(Monday Edition).

장률 스트라이프 셔츠 리스(Leiss), 팬츠 르메르 바이 매치스패션(Lemaire by MATCHESFASHION). 김여진 슬리브리스 톱 코스(COS), 팬츠 어나더 투모로우 바이 매치스패션(Another Tomorrow by MATCHESFASHION).

연극열전 8의 두 번째 이야기 <마우스피스>는 슬럼프에 빠진 중년 작가 ‘리비’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청년 ‘데클란’이 만나면서 시작된다. 리비는 데클란의 그림을 본 후 그가 살아온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펜을 든다. 둘은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지만 리비는데클란의 고통스러운 삶이 흥미로웠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리비와 데클란의 이야기를 보여주다 어느 순간 리비가 극 중에서 쓰는 작품으로 프레임을 전환하기도 한다. 리비가 쓴 연극의 결말은 누가 정할 수 있는 걸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인생을 대상화해도 되는 걸까, 무엇이 연극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마우스피스>는 배우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녹음기를 켤게요. 장률 저 연기해야 돼요?(웃음) 김여진 연극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제가 녹음기를 켜면 데클란(장률)이 이 대사를 해요. 요즘은 모든 상황에 극 중 대사를 대입하게 돼요.

연극열전 8 <마우스피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해요. 김여진 <마우스피스>가 우리나라에서는 초연이에요. 이런 작품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죠. 대본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욕심이 났어요. 작품 자체가 놀라울 만큼 좋아요. 장률 작품이 차갑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이 작품에서 차가움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우스피스>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상대를 알고 싶고, 그 마음에 공감하고 싶지만 어느 선에서 물러나게 되죠.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어요. 좀 더 어른이 된다면 좀 더 많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하는 작품이죠.

리비와 데클란은 어떤 인물인가요? 김여진 리비는 차세대 예술가로 촉망받던 인물이에요. 하지만 재능을 더 펼치지 못하고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한 채 외롭게 혼자 살아가요. 절망적인 상황에 있죠. 그러다 그림을 그리는 데클란을 보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해요. 40대 여성이 겪는 고독, 외로움, 불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요. 데클란의 재능을 본 후 다시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갖죠. 장률 데클란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동시에 가난한 삶을 살고 있고 폭력에 노출되어 학대받는 인물이죠. 이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힘겨워해요. 그러다 리비를 만나 그림에 더 눈을 뜨고 리비를 좋아하게 돼요.

작품을 연습할수록 처음 접했을 때와 느껴지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률 선배들을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달라져요. 글로 읽을 때보다 이야기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같아요. 리비와 데클란처럼 (김여진) 선배와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세대 간에 존재하는 감정의 차이가 좀 더 와닿았어요. 이 감정을 공유할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졌죠. 연습하면서 선배들과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눠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다를 때도 있죠? 김여진 있어요. 한번은 연습이 끝나고 출연 배우 4명과 연출이 막걸릿집에 갔어요. 그 자리에서 어떤 장면에 대해 얘기하는데 각자 해석이 다른 거예요. 의견이 서로 부딪치고 섞이다가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지나는 중이에요.

이 작품이 배우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뭔가요? 김여진 제가 겪은 많은 일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 맺은 관계에 대해서요. 배우로 살다 보면 누군가를 계속 관찰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연기할 때 어떤 점을 가져올 때도 있어요. 다른 사람을 겪으며 한 경험을 연기에 대입하는 거죠. 극 중 리비도 마찬가지예요. 데클란과 관계를 맺으며 이 과정을 글로 써요. 그러다 보면 상대를 대상화하게 되죠. 상대방을 약간 떨어져 보게 되는 순간들이 생겨요. 저도 살아오며 그랬고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리비는 데클란을 만나 공감하지만 어느 때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글을 쓰고 상대의 안쓰러운 인생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나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이 오만일 수도 있어요. 여러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앞으로는 사람을 대할 때 관계를 떠나 사람 자체로 대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장률 <마우스피스>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질문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돼요. 김여진 우리는 누굴 만나든 그 사람이 가진 틀을 보게 돼요. 가령 오늘 우리가 기자와 배우로 만난 것처럼. 하지만 이 작품을 만난 후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하고 관심을 갖게 됐어요.

데클란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요? 장률 관객이 궁금증을 가지고 접근하게 하고 싶었어요. 도대체 뭐지, 이런 식으로. 그러다 친숙한 인물로 다가갔으면 해요. 이 친구가 살아온 삶에 공감하며 심적으로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러다 데클란이 가진 감각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물과 거리가 멀어졌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에는 데클란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함께 사유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제가 연기를 잘해내서 이 네 단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요. 김여진 리비와 데클란은 서로 만나기 어려운, 각자의 세상에서 살던 인물이에요. 리비는 극작가이자 마음만 먹으면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볼 수 있는 사람인 반면 데클란은 연극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는 있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공연 티켓을 살 수는 없어요. 다른 세상의 두 인물이 만나면서 서로 이질감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친숙하게 느끼고 다시 간극을 느껴요.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다를 것 같아요. 김여진 특히 이번 작품은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작업이었어요. 첫 연극인 <클로저>를 할 때는 완성된 형태가 있었어요. 그 형태에 맞춰 어긋나지 않도록 연기했죠. 반면 <마우스피스>는 연습을 시작한 이래 실험을 거듭하고 있어요.(웃음) 연출과 다른 배우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이런 생각이 들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해요. 그리고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죠. 제 연기 경력이 짧지 않다 보니 어떤 장면을 보면 정해진 답이 보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다른 배우들은 그 정답을 따르는 대신 늘 다른 시도를 해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에너지예요. 그 에너지가 부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열등감도 느껴요.(웃음) 언제까지 해볼 거야, 이러면서 화낼 때도 있고. 하지만 가장 큰 감정은 계속되는 변주에 대한 놀라움이에요. 장률 배우도 마찬가지죠. 왜 이런 친구들 있잖아요. 모범은 아닌데 기발한. 정답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엉뚱한 대답을 해요. 이런 점이 절 많이 자극하죠. 도움도 많이 되고. 잊지 못할 작업이 될 거예요. 이 작품 자체나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 모두. 장률 연기 경험이 많지 않아 마치 제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하기가 주저돼요. 그래도 해볼게요.(웃음) 연극은 다른 언어를 가졌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카메라의 언어도 있어요. 클로즈업과 풀숏이 주는 느낌이 다르니까요. 연극은 배우가 언어가 되어야 해요. 이 언어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리 작품에있어요. 김여진 관객이 영화를 볼 때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마우스피스>는 연극에 관한 연극이기도 해요. 관객이 연극 속으로 들어와야 하죠. 물리적으로도 작품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게 돼요.

쉽지 않은 작업이겠어요. 김여진 죽을 만큼 어려워요.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무대에 펼쳐지는 설정과 세계가 자꾸 변해요. 우리가 있는 세계였다가 그 프레임이 변해버리죠. 이런 변화무쌍함이 대본에 모두 들어 있는 것도 신기해요.

작품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고민을 던져준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요? 김여진 결말. 고민할수록 블랙홀로 빠져들게 하는 신이에요. 관객도 마지막 장면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마치 뉴턴의 물리학을 얘기하다 불쑥 아인슈타인을 얘기하는 것 같다고 할까? 갑자기 차원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거예요. 배우로서는 굉장히 슬프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도록 해야 해요. 전달자이자 당사자가 되어야하죠. 결말 부분에 관객에게 이 메시지를 정확하게, 아주 꽉 찬 감정과 더불어 꽉 찬 사유를 전달하고 싶어요.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머리를 쥐어뜯는 중이에요. 장률 어려운 장면이 무척 많아요. 전 리비를 처음 만날 때가 어려웠어요.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잘 모르겠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정이 있는데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죠. 무대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훨씬 빨라요. 두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의 감정까지 표현하려면 실타래를 잘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만나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더 고민이 많았어요. 김여진 맞아요. 작품이 굉장히 섬세해서 첫 단추를 잘 잠근 다음 저와 장률 배우 둘이서 3백 개 정도의 단추를 잠그는 기분이에요. 아주 촘촘히 쌓아 올려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잘못 꿰면 망하는 거죠.(웃음)

3백 개의 단추를 잠그고 나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감정과 사유는 무엇인가요? 장률 공연이 끝나면 관객 모두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요.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극장을 찾지만 각자 있던 곳으로 돌아가죠. 그곳에서 한 번쯤 데클란과 리비가 왜 그렇게 했을까, 왜 그렇게 됐을까, 혹은 데클란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리비는 어떤 그림을 보고 여기까지 왔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으면 해요. 재능 있는 친구를 봤을 때도 그렇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어른을 봤을 때 인간적인 끌림이 생기잖아요.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도 있는 일이고. 공연을 보고 난 후 관객이 데클란과 리비의 삶을 한 번쯤 떠올렸으면 해요.

처음 대본을 읽고 연습하며 인물을 만들어가고 첫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여진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두 존재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이질적인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다룬 이야기예요. 대본 속 리비와 데클란처럼 저도 지금껏 해보지 않은 작업 스타일로 후배들과 만나고 있어요. 이런 점이 분명 제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죠. 뭐랄까, 화학작용이 일어나 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의 시간이 앞으로 연기하는 데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뭔가 변할거예요.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면 이 작품을 만난 이후 모든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 엄청 좋아요. 장률 배우와 첫 페어 연습을 하는데 13시간 동안 했어요. 밥 먹고 연습하고 중간에 다른 얘기 하다 다시 연습하고. 돌이켜보니 가족을 포함해 누군가와 이렇게 오랜시간 한 가지 일을 같이 한 적이 없어요. 재미있는 건 둘이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계속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어느 한 사람과 13시간을 쉬지 않고 대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리비와 데클란이 계속 얘기를 주고받는 것처럼요. 아마 작품의 영향으로 서로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제게 일어날 변화가 궁금해요.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지었던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아요. 멈추기보다 좀 더 나아가고, 더 얘기할 수 있고. 더 이상 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나도 더 변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아요. 장률 공연이 2주 남은 지금 너무 무서워요. 이 와중에 선배들과 함께 고민하고 아주 작은 소품까지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있어 재미있고 즐거워요. 모두 하나에 집중해서 해내고 있어요. 둘이 함께 얼음 위를 걸으며 의지하기도 하고 누군가 넘어질 것 같으면 잡아주며 도착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어요. 배우라는 일이 고독하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모두가 확신을 가지고 달리다 보면 재미있어져요. 이 지점이 바로 희열의 순간이기도 하고.

다른 예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연극만이 가진 힘은 뭘까요? 김여진 연극이 최고예요.(웃음) 하지만 무서워요. 가장 매력적이기도 하면서도 힘들고, 끝나면 허무한. 연극은 라이브잖아요. 1시간 30분의 공연을 위해 두 달 남짓 에너지를 쏟아부어요. 매일 10시간씩. 오직 하나에만 몰입해서 파게 돼요. 그렇게 흠뻑 빠져 몰입해서 미친 듯이 공연을 준비하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나 관객을 직접 만나죠. 무대 위에 서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숨길 수 없이 다 보여주고 사라져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장률 요즘은 콘텐츠가 아주 많아요. 장르도 다양하고.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도 많죠. <마우스피스>에도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람들은 계속 진짜를 원하잖아요. 진짜, 진짜 같은 걸 원해요. 이런 생각이 점점 강해지다 보면 연극도 일종의 체험 영역이라는 점에서 더 많은 관객이 찾지 않을까요?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연극이 지향해야 하는 건 체험이라는 생각. 공연장을 찾은 관객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동안 같은 세계에서 살게 되니까.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이 있어요.

<마우스피스>가 자신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았으면 하나요? 김여진 한계 극복 또는 성장. 마치 처음 연기하는 기분이에요. 연기를 25년이나 했는데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것만 같아요. 그래서 기쁘고 이 작품이 제게 와줘서 고맙고. 잘 마치고 나면 지금까지와 다른 성장을 할 수 있겠죠. 관객에게는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요. 왜 그런 순간 있잖아요. 과거를 생각하며 내가 그때 그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왜그랬지, 하며. 지난 일을 돌이키다 보면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죠. 그런 게 성찰인 것 같아요. <마우스피스>를 보고 나면 그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를 바라보는 시간. 장률 나를 들여다보고 마주할 용기를 주는 작품이에요.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기가 어렵잖아요. <마우스피스>는 자신의 좋은 모습뿐 아니라 싫은 모습까지 직면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줄 거예요. 저도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