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크루엘라>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 (1961)에 등장하는 빌런이다. 원작에서는 모피에 미쳐 달마시안 개들을 도살하려는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악행의 동기는 디즈니 만화 속 다른 빌런들 (인어공주의 마녀 ‘우르슬라’, 백설공주의 마녀 ‘그림하일드’ 등)과 조금 다르다. 대부분이 주인공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질투하여 일을 벌일 때 크루엘라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입고 싶은 옷을 입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2021년 엠마 스톤이 연기한 크루엘라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영화에서 크루엘라는 ‘에스텔라’가 자신에게 직접 부여한 또 다른 인격이다. 에스텔라는 엄마의 가르침대로 타고난 흑백 머리를 모자로 감추며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천재적이고 지기 싫어하며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땐 스스로를 크루엘라라 명명한다. 교복 대신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짜증나는 남자애는 발로 차버리는 크루엘라는 ‘기가 세다’는 말로 압축되며 눌려왔던 여자들의 어린 시절을 반추시킨다.

원작에서 크루엘라가 고용한 좀도둑으로 등장하는 ‘재퍼스’와 ‘호레이스’는 에스텔라가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고, 에스텔라의 재능을 눈여겨 본 재퍼스의 도움으로 에스텔라는 백화점을 거쳐 런던 최고의 패션 브랜드 ‘하우스 오브 바로네스’에 입사하게 된다. 여기서 또 다른 빌런이 등장한다. 디자이너 ‘바로네스’는 원작 속 크루엘라를 떠올리게 하는 이기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악녀다.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욕망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한다. 그는 에스텔라의 남다른 안목을 알아채, 함께 만족스러운 컬렉션을 만들어가지만 가까이에서 바로네스를 지켜보는 에스텔라는 엄마의 죽음과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곧 깊이 숨겨두었던 크루엘라를 드러내 바로네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연상 시키는 의상과 에피소드, 영국발 펑크록이 생동하는 앵글 속에서 크루엘라가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촘촘히 짜낸 영화 <크루엘라>는 잘 만든 프리퀄이다. 그런데 여성의 복수에는 왜 반드시 복잡하고 깊은 사연이 필요할까. 비슷하게 복수의 서사로 흘러가는 액션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들은 비밀 요원이어서, 돈을 위해서, 가끔은 그저 자신의 개를 죽였다는 이유로 수백 명을 죽인다. 크루엘라는 복수를 위해 가정환경에 큰 문제가 있어야 했고 (그의 골치 아픈 기질은 모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일이 해결되도록 도와주는 남성들이 필요했고, 타고난 예술적 재능까지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직설적인 말투와 대담한 행동 때문에 악녀로 분류된다. ‘디즈니’의 ‘12세 관람가’ 영화이므로 크루엘라가 죽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논외로 할 수 있으나, 바로네스라는 또 다른 악녀를 만들어 여성 간 대결 구도를 고수한 것도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영화의 말미에 크루엘라는 에스텔라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사회적 합의에 길들여진 무해한 에스텔라를 스스로 죽인 크루엘라는 진짜 나의 모습과 욕망을 전부 드러낸 채 새 삶을 시작한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를 보며 그저 ‘아니타’ (엄마 달마시안 ‘퍼디’의 주인)처럼 욕심 없고 선량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 속에 자란 나는 <크루엘라>를 보며 조금이라도 틀어질 미래가 훨씬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