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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상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은 각기 다른 시대의 배우들에게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배우 A와 B가 오래전 죽은 분장실의 망령이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프롬프터를 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다 전쟁이 나서 목숨을 잃은 A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린 B다. 현재 <갈매기>의 주연 ‘니나’를 연기 중인 배우 C는 어딘가 음습한 분장실의 기운을 느끼지만 자신이 오롯이 끌고 나가야 하는 연기연습에 예민하게 집중한다. 건강 악화로 자리를 비웠던 C의 프롬프터 D는 퇴원 후 돌아와 느닷없이 C에게 ‘니나’ 역을 돌려달라는 황당한 말을 한다.

1977년 처음 막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시미즈 쿠니오’작 <분장실>은 배우들의 욕구와 해갈되지 않는 갈망을 시대적 한계를 관통하며 다룬다. 나아가 여성의 삶과 자유에 대해 가치 있는 편린들을 던진다.

A와 B는 과거 자신들이 참여했던 연극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대사를 읊는데 그 인용들은 여성으로서의 삶이 두드러진 부분들이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중 ‘맥베스 부인’이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다오!” 하는 대사에는 욕망만큼이나 자신을 옥죄는 여성들의 죄의식이 묻어있다. A는 예쁜 여자 역이 아닌, 극의 키를 쥐고 있는 남자 주인공 역을 원하기도 한다. A와 B는 매일 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연극을 준비하는 동시에 프롬프터로 끝난 자신들의 인생을 자조한다. 한편 D는 배우로서 질투와 미묘한 경멸을 반복하며 C에게서 ‘니나’ 역을 뺏으려 한다. 늙어가는 몸과 고독으로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C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했음을 강조한다. 고독도, 잔혹함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며 “내 심장에는 수염이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등장하는 배우들 중 유일하게 ‘니나’역을 성취하고 지키고 있는 C. 극 중 결국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닌, 인내력과 신념이 아니겠냐는 <갈매기> 속 니나의 대사가 반복되는 이유다.
A와 B 그리고 D는 이제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연극을 시작한다. 그 극을 체홉의 <세 자매>로 고른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아직 끝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자. 저 즐겁고 기쁜 악대의 연주 소리, 저 소리를 들으니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것만 알 수 있다면 ……”

‘올리가’ 역을 맡은 A의 마지막 대사는 여성의 욕망을 다룬 책 <욕구들>에서 작가인 캐럴라인 냅이 던지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만큼,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아있음을 마음껏 즐길 만큼 그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연극 <분장실>은 8월 7일부터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서이숙, 정재은, 배종옥, 황영희 등의 배우진으로 개막한다. 9월부터는 남자 배우 버전으로도 볼 수 있다.

연극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