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개봉 2022.02.16.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멜로/로맨스, 드라마
국가 미국
러닝타임 134분

 

한동안 폴 토마스 앤더슨은 어딜 가나 해명부터 해야 했다. “<리코리쉬 피자>는 피자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제목은 197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 레코드숍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를 배경으로 작품을 구상하던 감독의 머릿속에 시대의 공기를 함축하는 키워드로 떠오른 단어다. 어쩌면 스물다섯 살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열다섯 살 개리(쿠퍼 호프먼)가 만나고, 우정과 사랑을 넘나들며 함께 성장하는 여름날이라는 포괄적인 풍경을 담기에 이만한 제목은 또 없을지 모른다. 실제로 이 영화는 과거의 향수를 토핑으로 가득 올려 관객에게 내어놓는 멋진 피자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보다 더 천진한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 영화가 과연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이란 말인가. 온몸을 육박해오는 폭력적 광기, 비틀린 욕망, 궤도를 이탈해서 어긋나는 관계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폐부와 트라우마를 예리하게 가로지르는 시선은 어디로 증발했을까. 폴 토마스 앤더슨 역시 과거를 그리워하는 나이가 된 걸까? “과거에는 모든 것이 멋졌다고 생각하는 중년이 됐다는 게 끔찍하다!” 질문을 듣자마자 장난스레 웃던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팬데믹 이전부터 과거를 회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게 스스로도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내 어린 시절로부터 일부 빚어진 멋진 여름날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프로덕션을 진행하다 보니, 약간은 멜랑콜리한 정서가 더해진 것 같다. 내 영화 속 인물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그들 인생에서 이토록 중요하고 빛나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잃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박탈당한 것 아닌가. 캐릭터들이 자유롭게 달리고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는 건 그래서 멋진 일이었다. ‘와우, 이거네’하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영화에는 1970년대에 샌 페르난도 밸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감독 개인의 추억과, 그의 지인이자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개리 고츠먼의 성장담이 얽혀있다. 극 중 개리는 할리우드 인접 지역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답게 어린 시절부터 배우로 일한다. 또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물침대 판매를 시작하는가 하면 이후 핀볼 머신 게임장 영업까지 사업을 확장해간다. 이는 감독이 고츠먼의 실제 사연을 시나리오에 반영한 것이다. 알라나와 개리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밀쳐냈다가도 다시 끌어당기고, 함께 잊을 수 없는 해프닝을 겪는 시간들을 그려낸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여름밤의 마법이 <리코리쉬 피자> 안에 있다.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메이킹 컷

이쯤에서 이 영화의 놀라운 첫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가장 잘 찍는 감독을 고르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름은 무조건 호명되어야 옳다. <리코리쉬 피자>는 개리가 다니는 학교를 배경으로 문을 연다. 교내 사진 행사가 있던 날, 알라나는 사진사의 보조로 일하고 있다. 알라나를 보자마자 호감이 생긴 개리는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알라나는 소년의 치기를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박자를 맞춰준다. 두 사람의 곁에서 따라 걷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니나 시몬이 부른 ‘줄라이 트리(July Tree)’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하모니.

“오프닝 시퀀스가 좋았다니 기쁘다. 내게 첫 장면은 정말 중요하거든.” 심지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따금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좋아하는 영화들의 첫 20분을 그냥 틀어놓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늘 첫 장면이 매력적이기를 바란다. 때론 미스터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주인공들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아무래도 영화의 첫인상이지 않나. 관객들이 기대하는 만큼 충분히 편안하지 않은 내용이라도, 어쨌든 조금이라도 말이 되는 설정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첫 장면을 찍고 볼 때만큼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스릴을 느끼기도 한다. 극장 불이 꺼지고 스크린의 커튼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 말이다. 이것이 내가 새 작품의 오프닝을 구상할 때마다, 매일 밤 되풀이해 상상하는 것들이다.”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영화에는 유독 달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알라나와 개리가 서로를 향해, 때로는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심장 박동이 된다. “달리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자유가 엿보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 자체는 마치 특수효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하니까.” 맞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흥을 전달하는 아주 강렬한 특수효과. “솔직히 말하자면, 달리는 행위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무척 즐거워했다는 사실도.”

샌 페르난도 밸리의 낮이 힘껏 ‘달리는 마음’으로 채워진다면, 밤은 기이하고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다. 석유 파동에서 비롯된 소동을 겪은 밤, 알라나는 기름이 떨어진 화물 트럭을 핸들 조작만으로 후진해 몰며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내려온다. 이 이미지는 그 자체로 <리코리쉬 피자>라는 별난 영화를 설명하는 인장이 되기도 한다. “샌 페르난도 밸리는 좀 이상한 공간이다. 여름은 정말 너무 덥고, 11월 중순까지도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기 일쑤다. 해가 지면 바로 잠들어버리는 도시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밤 문화 자체도 없다. 1970년대라면 핀볼 머신 영업장 정도만이 열려있는 거지. 이게 나와, 내 영화 속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시공간이다. 영화 속 밤의 무드는 내가 느끼는 인상의 반영이다.”

알라나와 개리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폭발적인 활약상을 보여주고 퇴장하는 잭 홀든(숀 펜)과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각각 할리우드의 명배우 윌리엄 홀든, 영화 제작자 존 피터스에 뮤지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면모를 얹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패러디된 캐릭터들이다. 하나같이 비대한 자아를 지닌, 미성숙한 괴짜들의 등장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다. “맞다. 언제나 약간은 미쳤거나 변덕스럽고, 엉뚱한 캐릭터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평범함 그 자체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 중에 좋은 작품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물론 히치콕 영화에는 종종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곧 전복적으로 바뀌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만큼이나 미치광이로 돌변하지 않나.”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는 <부기 나이트>(1997),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2012)와 같이 남성들의 욕망과 회환이 강하게 발현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팬텀 스레드>(2017)와 <리코리쉬 피자>와 같이 여성적 시각을 견지하는 작품도 있다. 특히 이번 영화는 크게 보면 개리와 일련의 사건을 겪는 알라나의 자아 찾기 여정으로도 읽힌다. 욕망을 인지하고, 내가 누구를 원하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는 시간들 속에서 알라나는 변화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특별히 의식적인 설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지금껏 내가 그린 그 어떤 남성 캐릭터에 비해 안정적인 개리”와 “그렇지 않은 알라나의 대비”가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개리는 알라나를 원하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다. 반면 알라나는 원하는 것이 아직 분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내 말은, 이런 캐릭터가 더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라나의 눈을 통해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정말 좋았다. 캐릭터 자체도 좋지만, 내가 알라나 하임이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폭넓은 이야기를 들려줄지 알고 있었거든. 오직 알라나만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나는 그 점에 의지하며 가는 것이다. 이게 콜라보의 아름다운 점이다.”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리코리쉬 피자>는 알라나 하임과 쿠퍼 호프먼이라는 원석의 배우들을 발굴한 영화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번이 첫 영화 작업이다. 알라나는 밴드 하임의 멤버로, 폴 토마스 앤더슨과는 뮤직비디오 연출가와 뮤지션 관계로 만나 인연을 이어왔다. 알라나의 어머니가 감독의 학창 시절 미술교사였다는 우연한 사연도 이들의 관계를 한층 흥미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쿠퍼 호프먼은 그 이름에서도 짐작 가능하듯,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원한 영화적 동지 고(故)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아들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배우의 길을 걷게 될까? “결국 흐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게 감독의 생각이다. “쿠퍼는 연기 외 다른 관심사도 많다. 반드시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 태도가 확실히 건강하고 멋지게 느껴진다. 다만 그는 아직 젊기에, 연기에 대해 생각하고 배울 날도 많지 않을까. 알라나 역시 뮤지션으로서도 충분히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으므로, 연기는 선택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그 넘치는 재능을 놔두고 연기를 그만둔다면 스스로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웃음). 나는 이미 그와 함께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 알라나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사람이거든.”

 

리코리쉬 피자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음악, 또 하나의 주인공

<리코리쉬 피자>의 사운드트랙은 1970년대 명곡들의 컴필레이션 그 자체다. 영화의 예고편에서부터 사용된 데이빗 보위의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는 음악 슈퍼바이저 린다 코헨과 상의를 통해 감독이 일찌감치 골라둔 곡이다. 음악은 카메라의 움직임, 스토리텔링, 세트 디자인 등과 더불어 영화의 톤 앤 매너를 설정하는 중요한 장치라는 것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철칙이다. 폴 매카트니와 윙스가 함께 한 ‘렛 미 롤 잇(Let Me Roll It)’, 더 도어스의 ‘피스 프로그(Peace Frog)’ 등의 명곡들이 수록된 가운데, 감독과 다수의 음악 작업으로 손발을 맞춰온 조니 그린우드가 작곡한 ‘리코리쉬 피자’ 역시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