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윤지 미술 감독과 박재범 감독.

이윤지 미술 감독이 입은 니트 베스트와 데님 점프수트 모두 위크엔드 막스마라(Weekend MaxMara). 박재범 감독이 입은 니트 스웨터 코치(Coach), 코듀로이 재킷과 팬츠 모두 아르켓(Arket).

 

한동안 거의 볼 수 없던 국내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정지된 모형을 조금씩 움직이며 한 프레임 단위로 촬영하는 기법) 작품이 45년 만에 등장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가능한 시대에 박재범, 이윤지 감독은 공들여 인형과 세트를 제작하고, 아주 조금씩 이들을 움직이며 촬영하고, 목소리를 입히고, 편집하는 인고의 시간을 택했다. 그리고 이들은 3년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을 완성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여름날 베이킹 소다로 만든 눈이 눅눅해져 다시 만들어야 할 때도, 극지방의 오로라를 표현하기 위해 수십 종류의 천을 구해야 할 때도 이들은 같은 마음이었다. 쉽게 가지 말자, 우리의 방식을 지키자. 그렇게 이어온 원칙은 자신이 태어난 땅을 지키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지키려는 ‘그리샤’의 결심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가늠할 수 없는 여정을 버텨온 이들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역할을 하며 완성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각각 어떤 역할들을 맡았는지 그것부터 정리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재범 맞습니다.(웃음) 저는 기획과 각본, 연출, 애니메이션을 담당했어요. 윤지 저는 미술감독 겸 애니메이터였고, 주인공 ‘그리샤’의 목소리를 연기했어요.

스톱모션이라는 애니메이션 기법과 그리샤의 이야기 중 어느 것에서 출발한 작품인가요? 재범 오래전부터 스톱모션 기법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어요. 목표가 아니라 꿈이었죠. 다니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는 진작 사라진 장르거든요.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품고 있었는데, 신기하게 제가 졸업할 즈음 장편 애니메이션이 다시 생긴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물론 무척 적은 예산으로요.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이야기를 찾았죠. 오래전에 감명 깊게 본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 속 설원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고, 어린 시절 잠시 어머니가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두려움과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덧입혀져 지금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어요. 윤지 이전에 박 감독과 같이 작업한 단편 애니메이션 <스네일 맨>이 사막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어서 다음에는 정반대의 환경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툰드라의 설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라니 단번에 같이 구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기획만큼이나 어떻게 구현해낼지 구상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과정이었을 것 같아요. 특히 툰드라 지역 유목민의 삶을 그려내는 부분이요. 재범 시작 단계에서 가장 큰 고민이 그 부분이었어요. 가보지 않은 곳이고, 경험하지 못한 생활양식이라 오류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컸거든요.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모두 찾아 살펴보고도 부족해 <최후의 툰드라>를 만든 장경수 PD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아주 많은 질문을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은 대답은 하나였어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그 말을 듣고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우리와 대단히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구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다만 그 안에서 작은 디테일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요. 냉장 보관할 것들을 집 밖에 두거나 문을 여닫을 때 몸에 배인 동작 등 잠시 스쳐가는 부분이라도 틀리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촬영에 들어가면서 세운 원칙도 있다고 들었어요. 이 작품을 완성하며 지킨 가장 중요한 원칙이 최대한 3D 효과를 배제하는 것이었다고요. 재범 오로라나 눈이 내리는 모습, 불이 나는 장면 등 배경이 되는 것들도 손으로 직접 만들어 찍었어요. 초반에 합성 작업을 하는 컴포지터들이 3D 효과를 입히더라고요. 그게 더 진짜 같고 완성도도 높아 보이니까요. 이상해도 되니까 다 빼고 우리가 찍은 소스 그대로 사용해달라고 했어요.

 

 

전통적인 스톱모션 기법을 지키고 싶었던 거죠? 재범 그렇죠. 우리가 만든 이야기의 방향이나 결에 더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빠르고 편하게 만들려고 했다면 애초에 이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윤지 쉬운 길로 가지 말자, 딴생각하지 말자, 이 두가지가 저희가 세운 원칙이었어요. 손으로 인형들을 움직이는 애니메이팅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스톱모션의 특성상 찍다가 중간에 동작이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는데, 그게 무서워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럼 영상을 완성하더라도 그 안에 담고자 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니 오래 걸리더라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넘어가지 말기로 한 거죠. 한 장면 찍는데 평균 8시간 넘게 걸렸어요. 초반 1년 정도까지는 ‘이 작업이 과연 끝이 날까? ’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 장면에 8시간이라니, 듣기만 해도 까마득해요. 그렇게 3년 3개월의 제작 기간을 버텨온 거잖아요. 재범 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치고 엄청 빨리 작업한 거예요. 픽사에서는 한 편에 수백 명이 투입되는데도 최소 5년이 걸리는데, 저희는 스무 명 조금 넘는 인원이 3년 3개월 만에 끝낸 거니까요. 그런데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다른 영화보다 훨씬 오래 걸리니까 게으르다는 오해를 많이 샀죠. 억울했습니다.(웃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윤지 화면 안에서 배경이나 모형이 지닌 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3D의 생동감과 2D의 따뜻한 분위기를 잘 합쳐놓은 기법이지 않나 싶어요. 재범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니 완벽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계획과 달리 막상 촬영하면 다른 움직임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형들이 때가 타거나 색이 바래기도 하는데 그게 어딘지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점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등장인물의 인형은 어떤 소재로 만든 건가요? 윤지 안에 있는 뼈대는 아마추어라고 하는 금속으로 만들어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설계했어요. 옷은 가죽과 털 질감이 나는 패브릭을 사용했고요. 실제로 사람이 입는 걸 작게 만들면 카메라로 촬영했을 때 의외로 어색하게 나오거든요. 저희가 구상하는 질감이 나오는 소재를 찾느라 이곳저곳 무지 돌아다녔어요.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기법인 때문인지 처음 접했을 때는 스톱모션 자체에 관심이 갔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자신이 태어나고 머무는 땅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이 땅의 것을 가져간 만큼 되갚아야 한다는 것을” 같은 대사가 이 영화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윤지 그리샤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이야기의 주제를 담은 후반부 내레이션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대사가 있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 ‘엄마’예요. 이 영화에서 엄마는 실재하는 엄마이기도, 숲의 주인이라 불리는 붉은 곰일 수도, 주인공이 나고 자란 땅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엄마라 부르는 말에 가족과 자연을 대하는 그리샤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의미가 있지 않나 싶어요.

이제 모든 과정이 끝나고, 영화가 관객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이 영화에서 관객이 어떤 것들을 발견하길 바라나요? 윤지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에도 이런 형태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알려지면 좋을 것 같아요. 재범 저는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워낙 흔치 않은 형태라 애초에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그 부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영화가 지닌 힘을 알아봐주는 분을 만난다면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동력이 생길 것 같아요.

다음 작품에서도 이토록 지난하고 어려운 스톱모션 기법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인거죠? 재범 네. 하지 말라는 거 계속 하는 편이라.(웃음) 여전히 저는 스톱모션으로 표현했을 때 더 설득력이 생기는 이야기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윤지 다음 작품은 제가 기획과 연출을 맡아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호랑이가 나오는 가족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해요. 재범 언젠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틀 안에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보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런 작품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그땐 손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