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과 메타버스는
자신들이 도달할 지점에
한계를 두지 않는
강력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2022년 6월에 데뷔한 슈퍼카인드(SUPERKIND)는 ‘버추얼 휴먼(AI)’ 세진과 ‘그냥 휴먼’ 유진, 건, 대이먼, 시오로 이뤄진 5인조 아이돌 그룹이다. “5명 전부 AI였으면 완전 싫었을 것 같지? 살아 있는 사람 사이에 AI가 섞여 있어서 거부감이 덜한 게 아닌지….” 친구 A가 슈퍼카인드를 소개하며 말했다. “남돌은 언젠가 다 군대에 가고, 결혼하고… 죽잖아.” A가 내 눈치를 봤다. “아무튼. 이 그룹은 AI 멤버가 계속 영입돼. NCT가 추구하던 진정한 ‘무한 확장’을 이룬다고 봐야지.” 나는 A의 말이 끝나자마자 낮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A는 아랑곳하지 않고 슈퍼카인드가 나오는 유튜브 라이브를 보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는 ‘그냥 휴먼’ 멤버 넷만 있었다. 왜 4명만 나오는 거냐고 물으니 “AI는 이런 활동은 안 하더라고. 그래도 자리는 이렇게 비워놓음.” A의 손이 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한차례 웃음이 터지려는 위기를 넘기고, 아무것도 없는 화면 속 빈 의자를 바라보다 왜 굳이 직접 만날 수도 없는 AI를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A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BTS랑 직접 만나는 사이야? 걔네도 어차피 다 가상이야. 따지고 보면 다를 게 없다고.”

K-pop 문화에서 ‘메타버스’(Metaverse),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의 기술은 BTS의 ‘Dynamite’ 버추얼 댄스 비디오나, 블랙핑크의 메타버스 팬 미팅처럼 일종의 마케팅 기법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했다. 2019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계관 안에서 창조된 가상의 K-pop 아이돌 K/DA의 성공이 버추얼 아이돌 시대로의 전환을 기대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나는 그들을 통해 기존 롤플레잉 게임 문화와 K-pop 팬덤 문화 사이에 큰 교집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ae(아이)’라는 가상의 아바타와 함께 데뷔한 에스파의 인기 또한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K-pop 소비자들에게 통한 결과라기보다는 음악, 퍼포먼스, 멤버들의 외형적 매력 등 SM엔터테인먼트가 아이돌 시장의 일인자로 군림하며 만들어온 고전적 성공 문법을 통해 획득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상현실과 K-pop은 젊고, 화려한 이미지를 공유할 뿐 보기와 달리 수용자의 입장에서 쉽게 융화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방송사와 OTT 플랫폼 역시 K-pop 기획사 못지않게 신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한 콘텐츠를 앞다투어 내보냈다. 그러나 <부캐전성시대>(TV조선), <아바타 싱어>(MBN), <가상세계지만 스타가 되고 싶어>(TVING) 등 메타버스 예능을 표방한 프로그램 대부분이 기존 서바이벌 예능 포맷에 AI 기술을 입힌 것 이상의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결국 TV와 같은 단방향 영상 매체에 한해 ‘메타버스 무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기성 콘텐츠와 신기술의 조합에 대한 회의감이 증폭하는 가운데 2023년 1월,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버추얼 걸 그룹 서바이벌 예능 <소녀 리버스>를 공개했다. 작품은 ‘버튜버(버추얼 유튜버)’, ‘K-pop 아이돌’, ‘서바이벌 예능’이라는 3중 포맷을 취하고 있지만 기술과 문화의 부조화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며 그 안에서 방송 콘텐츠의 유희적 본질을 찾는다. 작품은 아바타 뒤에서 말과 행동이 좀 더 자유로워지는 출연자들을 통해 메타버스의 순기능을 말하기도 하고, 가상현실에서도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한국형 메타버스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메타버스가 현실 사회와 결코 유리될 수 없는 개념임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데 성공한다.

<소녀 리버스>가 버추얼이라는 포맷을 통해 기존 K-pop 걸 그룹 팬덤의 니즈를 공략했다면, 유튜버 우왁굳이 제작한 <이세계 아이돌>(이세돌)은 K-pop이라는 포맷을 통해 버추얼 유튜버, 보컬로이드 기술을 구현하면서 해당 매체 소비자들을 공략한다. 픽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에게 열광할 수 있는 이들과, 존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서로 성질이 다른 집단이다. 그렇기에 <소녀 리버스>와 ‘이세돌’의 활동은 두 가지 문화 중 무엇이 먼저 흡수되며 정착할지를 실험하는 과도기적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K-pop 소비자들에게 버추얼 아이돌은 종종 윤리적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가상의 존재이기에 노동착취 등의 문제에서 자유롭고, 인간이 아니기에 아티스트에 대한 팬들의 인권침해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K-pop 아이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변의 변화나 사생활과 관련한 구설이 없으니 제작자와 팬덤 모두 그들이 생산한 콘텐츠를 온전히 ‘상품’으로만 대할 수 있다. 넷마블과 카카오가 합작해 만든 걸 그룹 메이브, 버추얼 IP 기업 블래스트가 제작한 보이 그룹 플레이브는 바로 이런 장점을 가진 가상의 아이돌이다. 이들은 기성 아이돌의 외모, 창법, 음악, 안무, 패션, 활동 방식을 그대로 모방해 K-pop 팬들에게 익숙한 느낌을 안기는 동시에 K-pop 아이돌 산업이 가진 각종 인적 리스크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어필한다.

그러나 상술한 버추얼 아이돌의 소비 윤리적 장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가상’이라는 개념은 정말 모든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의 제작사가 아담의 ‘서비스’를 종료하자 보컬을 담당했던 실제 가수 ‘제로’는 한동안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불합리한 계약 조건으로 인해 독자적인 활동 또한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나온 버추얼 K-pop 아이돌 역시 모두 아바타 뒤에 진짜 사람이 존재한다.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은 엄연히 기획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므로 계약된 노동자다. 그들의 입장에서 버추얼 K-pop은 오히려 좀 더 쉬운 착취 구조를 가진 산업이 될 수 있다. 가상의 존재가 주는 안전감 역시 일부 소비자에게는 면책으로 작용해 대상에 대한 폭언과 비이성적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고, 비윤리적 2차 창작 문제가 커뮤니티 내부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제작자 입장에서는 이런 점을 게임 공간에 적용하는 룰과 버전의 업데이트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윤리적 대안의 기능마저 불확실하다면 K-pop 소비자는 버추얼 아이돌을 기존 아이돌 시장에서 동등하게 비교하며 큰 차별성이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유물론자들은 메타버스를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안 공간으로 기대하기도 했지만, 메타버스는 결국 자본주의 문화와 결합해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래서 지금의 메타버스에서 느껴지는 자유는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가 합의하에 금지하고 지양하는 것에 대한 배설로서의 해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상이기에 뚱뚱한 아이돌, 유색인종 아이돌, 장애가 있는 아이돌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몸과 얼굴이 등장할 법도 한데, ‘진짜처럼 보이는 것’, ‘잘 팔리는 것’이 중요한 이 시기의 버추얼 아이돌은 대부분 마른 체형과 하얀 피부를 가진 비장애인으로 그려진다. 이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추구하는 다양성을 아무런 제재 없이 역행하기에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현실을 미러링한 메타버스 K-pop의 경험과 논의가 다시 현실에 적용되려면 창작물과 현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당위를 계속해서 주지해야 할 것이다.

산업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지금 K-pop 메타버스는 각 문화가 정점을 맞은 과정에서 강제된 우연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pop과 메타버스는 자신들이 도달할 지점에 한계를 두지 않는 강력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산업의 결합 자체를 K-pop의 미래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음 세대와 다음 시대를 상상하며 발전하는 문화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한국 사회의 각종 문제를 떠안은 채 질주하는 K-pop 메타버스에는 더욱 ‘진짜 같은’ 기술과 더욱 가혹한 경쟁은 불필요하다. K-pop 수요층에 대한 좀 더 다양하고 과감한 예측과 해석, 인류 전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창작자와 소비자가 이런 고민과 논의를 함께 할 때 비로소 ‘K-pop-ae(아이)’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