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ENCIAGA

직접적이고 강렬한 메시지가 발렌시아가 쇼장에 밀도 있게 채워졌다.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그 메시지는 바로 환경에 관한 것. 모델들은 세기말 분위기의 옷을 입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위를 걸어 나왔는데, 넘실거리는 파도와 까마귀 떼, 이글거리는 용암 등을 수면에 투영해 초현실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게다가 물에 잠긴 시테 뒤 시네마를 쇼장으로 구현해, 급격한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을 경고하는 메시지가 관객의 귓전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뿐 아니라 쇼에 사용한 물은 파리시에 반환해 재사용할 것임을 공지했다. 뎀나 바잘리아가 자신이 가진 힘을 환경문제에 경각심을 갖게 하는 데 사용한 의미 있는 쇼였다.

 

GUCCI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타고난 스토리텔러다. 그가 구찌의 새로운 장을 성공적으로 써나가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이 바로 광기 어린 스토리다. 이번에 그는 쇼의 이면에 주목했다. 쇼 시작 전 사람들은 자유롭게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이 메이크업을 받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쇼가 시작된 후에도 거대한 텐트 안에서 수많은 스태프와 모델이 옷과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현장을 적나라 하게 공개했다. 모든 모델이 옷을 입고 안에 있던 스태프들이 텐트 앞에 둘러선 후, 짧은 런웨이가 시작됐다. 굳이 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의도가 눈앞에 명확하게 펼쳐졌다. 미켈레의 예술성에 공조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LOUIS VUITTON

시간의 충돌. 루이 비통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총동원했다. 루브르 박물관 안뜰 쿠르 카레에 마련한 런웨이 한쪽 벽엔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온 2백 명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1백15명의 합창단원, 85명의 조역이 15세기부터 1950년대의 시대상이 담긴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이들은 쇼를 감상하던 중 기립해 합창하거나 연기를 선보이며 웅장하면서도 기묘한 장면을 연출했다. 캐릭터 2백 명의 연출은 코스튬 디자이너 밀레나 카노네로, 무대감독은 프란시스코 네그린, 세트 디자인은 에스 데블린이 맡아 루이비통이 제시하는 새로운 미학을 대담하게 풀어냈다. 브랜드가 꿈꾸는 ‘시간을 넘나드는 아름다움’을 뇌리에 새긴 쇼!

 

JIL SANDER

질샌더 쇼장엔 그저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길게 늘어선 나무 의자를 따라 걷던 모델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고, 모두 착석한 후 다시 일어나 퇴장하며 쇼가 끝났다. 특별하고 대단한 장치는 아니었지만, 질샌더와 꼭 닮은 미니멀하지만 힘 있는 공간과 연출이었다. 그림처럼 앉아 있는 모델들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고, 서정적인 여운이 잔잔하지만 깊게 남았으니 말이다. 이로써 마이어 부부가 자신들이 집도하는 브랜드에 완벽하게 젖어들었음을 모두 공감할 수 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RADA

이번에도 OMA/AMO의 솜씨가 분명했다. 광장으로 탈바꿈한 기하학적인 공간엔 수많은 빨간 문과 레트로풍 그래픽 패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특하게도 무대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식으로 지었는데, 이는 보는 사람들에게 ‘관음적 시선’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라고 전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설파하고자 하는 여성의 힘과 태도에 대한 이미지를 쇼장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프라다 걸들을 통해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프라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적인 순간이었다.

 

SAINT LAURENT

어둠과 빛의 극적인 대비를 유독 사랑하는 안토니 바카렐로는 이번엔 더욱 드라마틱한 방식을 택했다. 스포트라이트를 활용해 런웨이 위의 모든 모델을 주인공으로 등극시킨 것. 모델들은 등장할 때부터 퇴장할 때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캣워크를 펼쳤다. 이 덕분에 라텍스를 메인 소재로 사용한 수많은 룩이 관능적으로 반짝이며 생 로랑의 감각을 과시했다. 불필요한 장치 없는 심플한 무대를 비춘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덕분에 관객은 새로운 컬렉션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