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사태가 과부하로 인한 일종의 ‘랙’이나 ‘버그’ 같은 개념이면 좋겠다. 그간 열심히 쌓아온 결과물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차라리 눈 딱 감고 재부팅 버튼을 눌러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나을 정도니까. 바로 코로나19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보행 신호에 돌연 횡단보도를 덮친 정신 나간 덤프트럭처럼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팬데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우리의 의식과 사고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등교 가방을 꾸렸던 어린아이는 계절이 바뀔 때까지 새 친구를 만나지 못했고,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직종이 화상 대화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를 이어갔다.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광활한 우주를 향해 로켓을 밥 먹듯이 쏘아대는 선진국부터 원인도 모른 채 맨몸으로 현 상황과 맞서 싸워야 한 지구 반대편 이름 모를 작은 마을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가 혼란의 시대를 맞으며 많은 것을 잃고 멈춰야 했다.

패션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은 물론 가까운 이들의 만남조차 제한된 상황이니만큼 매 시즌 열리던 패션쇼 또한 ‘라떼는 말이야’로 소개해야 할 하나의 추억 팔이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당장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니니 매년 새롭게 찾아오는 컬렉션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관중을 잃은 패션 하우스들은 런웨이 대신 디지털이라는 새 창구를 활용해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모색했다. 그렇게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마침내 도래한 2021년, 남자의 싸움은 힘이 아니라 희망이 커질 때 승리가 보인다고 했던가. 올해 1월 공개된 2021 가을·겨울 남성 컬렉션은 겁을 상실한 듯 맹렬한 기세로 어느 때보다 묵직한 메시지를 전했다. 저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돌아온 남성 컬렉션. 패자 없는 싸움터지만 유독 넘치는 파이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베스트 컬렉션을 소개한다.

 

디올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디올 DIOR

디올의 남성 컬렉션을 이끄는 아티스틱 디렉터 킴 존스는 2021 가을·겨울 컬렉션을 통해 디올 하우스의 유서 깊은 헤리티지와 현시대의 컨템퍼러리 감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룩을 선보였다. 과거 오트 쿠튀르를 바탕으로 완성한 디올 특유의 화려함이 새로운 시대에 녹아들며 실용성을 겸비한 남성복으로 재탄생한 것. 디지털 파리 패션위크에서 공개한 이번 컬렉션은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녘을 연상시키는 푸른빛 런웨이 위로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의 룩이 유성처럼 쏟아지며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안겼다. 그간 레이몬드 페티본, 카우스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협업을 선보이며 예술과 패션의 교류를 이어온 킴 존스는 스코틀랜드 출신 현대미술가 피터 도이그와 함께 또 한 번 예술적 앙상블을 완성했다.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리는 화가’, ‘시를 그림으로 옮기는 화가’라는 수식어를 가진 피터 도이그는 자신의 작품과 디올 아카이브 속 다양한 장면을 핸드 페인팅으로 새롭게 표현했고, 이렇게 완성한 작품을 컬렉션 곳곳에 접목했다. 컬렉션 전반에 밀리터리 코드를 가미한 2021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피터 도이그의 작품은 자수, 자카드, 프린트 등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 아우터와 니트웨어, 셔츠 등 다양한 아이템에 고귀한 생명력을 더했다. 오트 쿠튀르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절제된 테일러링, 포멀한 미감을 겸비한 현시대의 실용성이 완벽한 호흡을 이룬 디올의 컬렉션은 예술과의 조우를 통해 새 시대에 말을 걸고 있다.

 

 

펜디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펜디 FENDI

전화벨 소리와 함께 시작된 펜디 컬렉션은 조명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 다채로운 색을 활용해 펜디 특유의 디스토피아 무드를 전면에 이끌어냈다. 디지털 컬렉션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하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 펜디의 이번 컬렉션은 다른 듯하지만 결국 하나의 획일적인 모습으로 이어지는 패셔니스타적 태도를 경계한다. 나아가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중시하는 남성복을 새롭게 정의한다. 디지털로 전개된 런웨이는 수십 개의 컬러 조명으로 만든 문이 가득 채웠고,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직접 피처링한 역동적인 리듬과 함께 다이내믹한 앵글로 세련된 시티 룩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과감한 실루엣의 아우터와 리버시블 워크웨어, 화려한 네온 컬러의 테크니컬 패딩 재킷은 이번 시즌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정의하는 새로운 남성복의 모습. 특히 이번 컬렉션에는 영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작가 노엘 필딩의 레터링을 접목해 재미를 더했다. 사이키델릭하게 표현된 펜디 로고를 비롯해 다양한 컬러로 완성한 그의 작품을 통해 컬렉션 전반에서 보여주는 퓨처리즘 무드에 묵직한 힘을 실었다. 런웨이가 끝난 뒤 이어진 영상에 등장하는 ‘What Is Normal Today?’란 문구는 단순한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는 사고의 시초로 작용하며 형형색색의 빛이 남긴 잔상과 함께 무료했던 일상을 뒤흔들었다.

 

루이 비통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루이 비통 LOUIS VUITTON

루이 비통의 남성 컬렉션은 아티스트 사울 윌리엄스가 스위스의 눈 덮인 설원을 걸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Ebonics’, ‘Snake Oil’, ‘The Black Box’, ‘Mirror, Mirror’ 총 4개의 테마로 구성된 이번 컬렉션은 한 편의 연극을 방불케 했는데,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 <스트레인저 인 더 빌리지>에서 영감을 받아 백인 사회에서 흑인 예술가로서 겪은 감정을 표현한 것. 사울 윌리엄스의 오프닝을 시작으로 대리석 조형물이 놓인 파리의 한 테니스 클럽으로 화면이 전환되며 본격적인 런웨이가 펼쳐진다. 맨몸으로 바닥에 눕거나 벽에 몸을 기대어 있는 등 무리에서 소외된 이들을 배경 삼아 커피나 신문을 들고 런웨이를 거니는 모델의 모습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한 것. 이러한 퍼포먼스 요소와 더불어 극대화한 모노그램부터 고층 빌딩, 비행기 등 시대의 발전을 상징하는 다양한 디테일이 3D로 더해지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와 함께 담대한 실루엣의 오버숄더 아우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노그램 수트, 빌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재킷, 비행기 모양 백 등 편견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색다른 룩을 선사한다. 컬렉션 곳곳에 내포된 ‘You Can Tell a Book by Its Cover’, ‘The Same Place at the Same Time’ 등의 추상적 문구는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시각을 견지하며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꼬집고, 차별과 평등이라는 존재의 영원한 대립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루이 비통 모노그램 백에 적힌 ‘Tourist vs. Purist’는 버질 아블로가 던지는 이번 컬렉션의 또 다른 화두. 다양한 흑인 아티스트와 최초의 트랜스젠더 모델 카이 이사이아 자말이 런웨이에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차별이라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패션으로 꼬집는 이번 시즌 루이 비통 컬렉션은 또 한 번의 채찍질로 현재에 지체된 우리를 다시 달리게 하는 진화의 기폭제 같았다.

 

 

프라다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프라다 PRADA

프라다의 컬렉션은 어느 때보다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라프 시몬스와 미우치아 프라다가 함께 만든 첫 남성 컬렉션이니만큼 다양한 가치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Possible Feelings’라는 주제로 전개된 이번 컬렉션은 친밀감과 교류를 소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렘 콜하스와 AMO가 마블, 레진, 페이크 퍼, 플라스터 등을 활용해 만든 ‘논-스페이스’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는데, 비비드한 컬러 팔레트와 라프 시몬스 특유의 디자인 요소로 프라다 남성 컬렉션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정의했다. 자카드 니트와 레더를 조합한 이색적인 아이템부터 엠블럼을 활용한 심벌 플레이, 리나일론, 트위드, 울 등 프라다 하우스를 상징하는 소재와 ‘보디 피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실루엣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런웨이 직후 두 거장은 세계 각지의 대학생들과 대담을 진행했는데, 이는 단순히 컬렉션에 대한 질의응답이 아니라 미래 사회에 관한 창의적 토론이 주를 이뤘으며, 디지털이라는 가치가 만든 새로운 형태의 컬렉션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계기였다.

 

 

에르메스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에르메스 HERMÈS

에르메스의 컬렉션은 런웨이를 직접 마주하진 못하지만, 7개의 섹션으로 구성한 화면 분할을 통해 다양한 시점에서 컬렉션을 바라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지난 시즌에 이어 비디오 아티스트 시릴 테스트와 함께 컬렉션을 관람하는 모두가 프런트 로에 앉아 자신이 원하는 룩의 다양한 면을 즐길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에르메스 남성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이번 컬렉션에서 캐주얼 무드와 우아함의 공존을 내세우며, 럭셔리 하우스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실용성을 겸비한 남성복을 완성했다. 바이커 블루종, 후드 파카, 집업 셔츠 같은 워크웨어에 기반을 둔 러프한 스타일이 물 흐르듯 쏟아져 나왔고, 에르메스 특유의 색감이 느껴지는 니트웨어와 트랙 팬츠 같은 편안한 스타일이 이와 공존하며 이 시대 남성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유연한 룩이 탄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드는 에르메스의 컬렉션. 포멀한 룩 위로 누군가 색색의 물감을 쏟은 듯, 우연을 가장해 정교하게 완성한 화합의 현장이었다.

 

 

드리스 반 노튼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드리스 반 노튼 DRIES VAN NOTEN

‘Dressing for Our Days’라는 주제로 전개된 드리스 반 노튼의 컬렉션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턱에 자리 잡은 불멸의 존재처럼 영롱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했다. 지난 시즌 화려한 컬러 팔레트가 컬렉션을 지배했던 것과 달리 이번 2021 가을·겨울 컬렉션은 블랙, 브라운, 다크 그린 등 편안함과 묵직함이 어우러진 어스 컬러를 기반으로 한다. 물 흐르듯 유연한 테일러링으로 완성된 커다란 라펠이 달린 싱글 코트와 트렌치코트는 드리스 반 노튼 특유의 고상한 품격이 느껴졌고, 기하학적 패턴을 활용해 완성한 프린트 셔츠와 쇼츠는 무게감 있는 컬러 사이에서 빛을 발하며 가을·겨울 시즌이 가진 계절성을 새롭게 전환하기에 충분했다. 스포츠웨어에서 영감을 받은 테크니컬 소재의 후디와 아노락 또한 드라마틱한 실루엣으로 어딘가 비범한 면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아이템. 모두가 스스로를 결박하고 구속을 편안함으로 느끼며 안주하는 시대, 천국의 문 앞에서 마주한 드리스 반 노튼의 컬렉션은 가슴 한편에 잠재된 자유를 향한 본능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로에베 2021 가을 겨울 남성 컬렉션

로에베 LOEWE

로에베는 1960대 히피와 모드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특유의 팝 무드가 곳곳에서 피어난 이번 컬렉션은 다채로운 컬러의 스웨터, 버클 스트랩과 지퍼로 펑키 무드를 더한 레더 팬츠가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며 색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특히 미국 작가 조 브레이너드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만큼 정해진 틀과 형식을 벗어나 마치 하나의 아트피스로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나비와 벌이 날아들 것만 같은 플라워 디테일이 컬렉션 곳곳에 자리하는데, 이와 함께 단순히 외적 아름다움을 넘어 팬츠 버튼과 아이템 곳곳에 쓰인 플라스틱 클립 모두 지속 가능한 소재로 만들어 환경과 지속 가능성 같은 숙명적 과제와 끊임없이 맞섰다. 또한 조나단 앤더슨이 이번 컬렉션을 통해 탐구하는 가치를 담은 ‘A Show in a Book’은 앞서 공개한 박스와 월 형태에 이어 팬데믹으로 인해 패션쇼가 사라진 세상에 대항하는 북 형태의 컬렉션. 뚜렷한 신념과 소신, 패션을 향한 열정이 어우러진 로에베의 컬렉션은 형태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랬듯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