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찬의 세계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오르한 파묵의 소설 <눈>을 읽고 시가 쓰고 싶어진 청년이 있다. 2012년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를 발표하고,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제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최연소 수상한 황인찬 시인. 그 앞에는 늘 ‘충격적으로’, ‘탁월한’, ‘놀라운’ 같은 강렬한 수사가 붙는다. 장황하고 화려한 요즘 시들 사이에서 황인찬은 최소한의 언어와 간결한 구조를 동원해 단정한 한 편을 직조해낸다. 평단과 독자의 소란스러운 찬사는 들리지 않는 듯 그가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를 발표했다.

‘공원의 모두가 은총 아래 있다 나란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노부부도 물 위를 홀로 걷는 고독한 남자도 모두 완전하다 나는 은총 아래 연인을 기다렸다 주말 오후의 빛이 공원을 비춘다 (중략) 연인은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이번 시집에 실린 ‘지국총’의 일부다. 어딘가 기이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고요한 세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일상의 사사로운 것들을 수집해 신비로운 풍경을 빚어내는 그의 장기는 이번 시집의 ‘종로’ 시리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명료하고 유려한 세계를 쌓아가며 그는 조금 더 깊어졌다. 서른을 앞둔 시인은 그렇게 한 시절을 뛰어넘었다.

예술가에게 차기작은 데뷔작만큼이나 중요하다. 데뷔작의 신선함을 걷어낸 채 진정한 내공을 검증하는 자리다. 첫 시집에 대한 관심이 이르고 과분하다 생각했다. 그만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결국 나를 향한 기대는 배반당하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 싶었다. 망하되, 의미 있게 망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시집을 냈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태도나 방법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첫 시집의 방식을 고수하면 더 완성도 높은 작업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결정적으로 내가 재미를 못 느낀다. 칭찬을 들으면 다른 게 하고 싶어진다. 한편으로는 그게 더 칭찬받는 길이고, 시에 더 충실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미 쓴 시들을 미워하고, 거기서 멀어지려고 했다.

독자와 평단을 배신하고자 했던 계획은 멋지게 실패했다. 출간 3일 만에 초쇄가 매진됐고, 벌써 3쇄를 찍었다. 단기간에 많이 팔렸다고 좋은 책은 아니다. 읽어보지 않고 구입했다는 의미니까. 첫 시집으로 인한 기대감으로 봐주는 것 같은데, 좋다고 할지 싫다고 할지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안다.

이번 시집에는 종종 아름다운 연애시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었다. 첫 시집과 비교하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화자의 행동이 늘어났다. 가만히 바라보는 태도가 줄다 보니 저절로 대상 간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관계의 기본 형태가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인데, 그 모습이 연애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마냥 사랑의 기쁨이 넘쳐나는 시는 없다. 어딘가 찜찜한 연애시다.

맞다. ‘비의 나라’라는 작품이 유독 아름답게 다가왔다. 한데 마지막 두 행을 읽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서늘해지더라. 평화롭고 아늑한 상황에 ‘상황이 좀 나아지면 깨워주세요’ 같은 문장을 통해 불안한 면면을 넣고 싶었다. 발화자를 통해 이 상황을 견디는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하고 싶었다.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 사랑은 재미없다. 그런 사랑은 현실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자꾸 뒷맛이 좋지 않은 시를 쓴다.

첫 시집을 내면서 평생 시를 쓰기 위한 자세로 ‘자신을 미워할 것, 포기하지 않을 것, 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은 유효한가? 시를 쓰게 하는 원초적인 힘은 자기혐오에 있다. 내가 싫으니까 자꾸 무언가를 하게 된다. 자기혐오는 결국 수치심과 연결되는데, 부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고, 만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 깊은 데서 올라오는 수치심이 나와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감정 중 하나다. 종종 시 쓰는 것이 괴롭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는데, 더 잘하고 싶으면 괴로워야 한다. 괴로움이 문제가 아니라 괴롭지 않은 것이 문제다.

트위터의 1백40자의 말이 때로는 시만큼 강렬하고 위트 있다. 이 시대의 시는 어떻게 될까? 즉각적으로 공감하며 ‘좋아요’를 누르게 만드는 짧은 말에 대한 욕구는 지속될 것 같다. 짧은 말의 대표가 트위터고, 공감의 세계가 극대화된 것이 페이스북이다. 하상욱씨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는 짧은 말과 공감을 모두 끌어안은 케이스다. 짧은 것을 읽으려는 욕구가 늘면서 시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행스럽기도 하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세 줄의 문장도 길다. 이미지에 매혹된 시대다. 황인찬의 시는 그림이 잘 그려진다. 시를 쓸 때 신경 쓰는 것이 가독성이다. 읽는 동안 부분 부분이 무슨 말인지 알고, 가능하면 상황도 바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요즘 시는 너무 어렵다’는 말을 안 듣고 싶다. 쉬운 시를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 읽히지만 그 속을 쉽게 들키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마지막 문장까지 호흡을 잘 따라오다가도 ‘뭔지 다 알았어’ 하고 책장을 덮어버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작품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 등 시와 시인에 대한 고민이 눈에 띈다. ‘시가 왜 있지?’, ‘시는 무엇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계속하며 두 번째 책을 엮었다. 당시의 고민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투영되기 마련인데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긴 것 같다. 나중에 원고들을 모아 보는데 ‘왜 이렇게 시에 짜증을 많이 부렸지?’ 싶더라.(웃음) ‘시는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적어도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태도로 시 아닌 것들을 걸러내며 시를 짐작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