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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했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실수라고 말했지만, 그건 J가 원하는 대답이었기에 했을 뿐이다. 내가 원한 건 J가 뒤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우는 여자에게 미안하다는 의미 없는 소리나 내뱉는 무책임한 놈이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고, J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복수다. 박찬욱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으로서 복수의 대상이 되는 건 최악의 경우이다. 그럼에도 다른 변명을 할 수 없는 건, 그럴 만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지난여름이었다. J보다 어린 여자를 만났다. J보다 가슴이 더 크고, 귀여웠다. 술을 마시니 더 예뻐 보였다.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큰 가슴에 안기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새로운 연애에 대한 갈망이 일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래서 잤다.

긴 꼬리는 결국 밟혔고, 외도 이후로 J는 달라졌다. 그녀의 말투는 마치 군대 고참 같았고, 추리력은 만취한 셜록에 버금갔으며, 우리의 대화는 검사와 피고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는 매 순간 나를 관찰했다. 무슨 향수를 뿌렸는지,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메일과 폰은 물론이고 카드 명세서, 내비게이션 기록까지 확인했다.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 의심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감시는 점차 주도면밀해졌다. 내 생활은 온통 그녀가 만들어놓은 부비트랩과 지뢰로 가득했다. 한번은 회사 선배가 내 차 조수석에 탔다. 우리는 점심에 갈비탕을 먹었고, 선배는 선바이저를 내리고 거울을 보며 이를 쑤셨다. 그 모습이 역겨웠지만, 더욱 혐오스러운 건 J였다. 그녀는 내 차에 타자마자 누구냐고 물었다. J는 선바이저에 자신의 머리칼을 꼽아놨던 것이다. 선바이저를 펼쳐 자신의 머리카락이 없자, 조수석에 누군가를 태웠음을 알아낸 것이다. 그녀의 영특함에 놀랐고, 앙칼진 목소리에 소름 돋았다. 나는 블랙박스 영상으로 회사 선배였음을 증명했고,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결국 또 내 잘못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이건 누구야?” J는 습관처럼 물었다. 몰라. 그게 누군데? 하고 답하면 그녀의 말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자를 궁금해하는 자신을 변호했다. 왜 자신이 나를 의심하는지, 자신은 의부증에 걸린 여자가 아니라 내가 외도를 했기 때문이며, 내가 의심받을 행동을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때마다 J는 울었다. 울면서 소리쳤다. 나는 또다시 사과했다. 그리고 이 논쟁 알고리즘이 영원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J에게 내 인스타그램의 팔로어들이 누군지 일일이 설명했다. 물론 설명하다가 결국 우리의 목소리는 다시 커졌고, 그녀는 듣기 싫다고 소리쳤다. 나는 “네가 알려달라며!” 소리치고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지웠다. 같은 이유로 다른 SNS도 모두 정지했다. 인터넷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 그것만이 의심받지 않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는 소셜미디어와 멀어졌다.

다행히 내겐 아직 오프라인 모임이 남아 있었다. 업무상 저녁을 먹거나, 친구들과 만나는 일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렇다고 저녁을 오래 먹을 수는 없었다. 누구와 먹는지 인증 사진도 찍어야 했다. 먹고 나서는 J를 만났다. 그리고 당연하게 문자와 카톡 검사가 이어졌다. 그런 J가 측은했다. J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걸 깨달았다. 그녀를 의심병 환자로 만든 건 나였다. 내가 노력하면 그녀가 나아지리라 믿었다. J에게 한 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믿을 수 있는 남자가 되도록 말이다.

여자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남자만 만났다. 술 안마시고, 운동만 했다. 목욕탕에 가거나 게임방에 갔다. 금녀의 영역만 다녔다. 쓰고 보니 이상하지만 어쨌든 게임방에서는 페이스타임으로 인증했다. 친구들도 그녀에게 손 흔들며 인사했다. J는 나만 봤다. 내 연락만 기다리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J가 매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그녀 말고도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J가 내게 집착할 때마다 그 어린 여자가 생각났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J와 나는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사귀는 게 옳은 걸까? 한 번 피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였다. 다시 그 어떤 집도, 마음도 자라날 수 없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용서했지만, 용서받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