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mcmacumd10_04

무용수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응시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연주를 할 듯하더니 갑자기 ‘음매, 음매’ 염소 소리만 낸다. 재작년 한국을 찾았던 미국의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 무대의 한 장면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충격과 당혹에서 비롯된 의문들이 머릿속을 메울 때쯤 무용수들은 곧 걷고 뛰고 돌고 엎드리고 매달리고 꺾고 비틀고 뒤집고 흔들며 몸을 움직였다. 몸짓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움직임의 아름다움, 고도의 테크닉, 조명과 음악, 영상과 몸짓의 조화가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된 작품이었다. 현대무용은 21세기 예술계에서 가장 전위적인 ‘모난 돌’이다.

현대무용, 혁신의 정점에 ‘댄스 엘라지(Danse Élargie)’가 있다. 2010년 극장 테아트르 드 라 빌과 프랑스 렌의 국립무용센터인 뮤제 드 라 당스, 에르메스 재단의 협업으로 시작된 무용 경연대회다. 2년에 한 번씩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무용이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온갖 예술적 해프닝이 벌어진다. 대회 형식부터 파격적이다. 나이와 국적, 학력, 장르에 상관없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출연자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과감한 시도를 한 아티스트들에게 영예가 돌아갈 것’이라는 심사 기준에 따라 무용, 연극, 시각예술, 건축, 영화 등 장르의 벽을 허문 가장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세계적인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 마기 마랭이 이 대회 출신이다.

올해 제4회를 맞은 댄스 엘라지가 ‘2015-16 한-불 상호 교류의 해’를 맞아 처음으로 파리가 아닌 도시, 서울에서 함께 열렸다. 지난 6월, 경연을 앞두고 대회 후원자인 에르메스 재단의 카뜨린느 츠키니스(Catherine Tsekenis) 이사장을 만났다. 무용가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문화홍보부에서 무용 담당 고문을 맡았던 그녀와 함께 무용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608mcmacumd10_02

 

올해 참가자들의 공연을 관람했나? 마지막 예선 작품들을 봤다. 댄스 엘라지가 해를 거듭할수록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와 비례해 참가자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에서도 열린 까닭에 올해는 역시 아시아 참가자가 유독 많았다. 몇몇 한국 팀의 작품을 봤다. 안무적인 요소를 강조한다거나 무용을 중심으로 풀어낸 프로젝트들이 많았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품도 인상 깊었고, 무엇보다 풍성한 구성이 흥미로웠다.

댄스 엘라지를 계기로 이후 더 크게 활약하게 된 안무가로는 누가 있는가? 제1회 때 우승했던 안무가 노에 술리에(Noé Soulier)는 경연 이후 직접 무용단을 만들었으며, 파리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있다. 현대무용가들 사이에서 댄스 엘라지가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라고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에르메스 재단이 댄스 엘라지를 후원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흔히 무용 경연이라고 하면 심사 기준을 퍼포먼스에 집중하지만 댄스 엘라지는 무용적인 것 외에도 연극이나 음악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의 결합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수상팀은 1년 동안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공연하는데 에르메스 재단은 수상 상금 이외에 1년 동안 소요되는 공연 전반의 재정적 지원도 하고 있다. 나아가 에르메스 재단은 공연 예술뿐 아니라 현대미술과 디자인 등 젊은 예술가들이 펼치는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 대한 노하우가 있는사람이다. 예술 분야 역시 지난한 기술적 수련 과정을 거쳐야 창의력도 발휘된다고 믿는다. 기술력과 창의력, 이 두 개의 핵심 키워드가 에르메스의 가치와 만난다고 생각한다.

무용가로 활동한 당신이 생각하는 창의적인 안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접목하는 것이 창의적인 안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는 아티스트의 치열한 고민과 무수한 시도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

현대무용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을 위해 무용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자면? 발레 등 기존 무용에 대한 인식으로 현대무용을 바라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무용에는 새로운 코드가 심어져 있는데, 세상에는 이런 예술도 있구나 하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로 생각하려 하기보다 그 광경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좋다. 수십 년간 현대무용을 봐온 나로서도 당혹스러운 공연이 꽤 있으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