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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만

P와 나는 꼬박 1년을 만났다. 그녀는 나처럼 강남보다는 종로에서 데이트하는 걸 좋아했고, 일렉트로 음악보다는 LP 바에서 틀어주는 오래된 음악을 좋아했으며, 극장에 가면 늘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영화를 골랐다. 우린 취향이 잘 맞았다. 하지만 비슷한 만큼 싸울 일도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던지는 말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잔인하게 상처 주는 일에도 무뎌졌다. 새벽 2시까지 싸우고 또 싸워도 결판을 내지 못한 우리는 그날 그렇게 전화상으로 헤어졌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요청으로 전화를 못 받는단다. 카톡도 읽지 않았다. 멘붕이었다. 집 앞에서 몇 번을 기다려봐도 P는 나타나지 않았다.

P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새로 올린 포스팅이 여럿 있다. 나와 헤어진 후 그녀는 동해에서 주말을 보냈고, 친구와 성수동을 산책했다. 과거 포스팅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이상하다. 우리가 함께한 기록이 전혀 없다. 1년간의 연애 기록이 모두 삭제됐다. 나는 이제 그녀의 피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세 번 정도 그녀에게 연락했다. DM을 몇 통 보냈고 전화도 걸었다. P는 여전히 답이 없다. 우리는 이대로 끝인가?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자꾸만 그녀의 SNS를 뒤적거리게 된다. N( 33세, 남)

 

해시태그만 남은 연애

도무지 SNS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가끔이야 재미로 한다 치지만 먹고 입고 바르고 하는 사소한 순간까지 찍어 공유하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피곤하다. 전 여친 A가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식당에서 밥이 나오면 그녀가 만족스러운 사진을 손에 넣기 전에는 젓가락 끝도 댈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딜 가나 모든 일정을 셀카부터 찍고 시작해야 했다. A에게 금세 정이 떨어졌고, 한 달 만에 연애는 쫑났다.

며칠 후 A와 아는 사이인 친구 녀석한테 문자가 왔다. ‘A의 계정 좀 들어가봐라. 가관이다.’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그녀의 아이디를 눌렀다. 그간 #럽스타그램으로 도배되어 있던 A의 피드는 그새 싹 바뀌어 있었다. 조명빨 잘 받은 샴페인 사진에는 #술스타그램 #이별주는샴페인, 내 얼굴만 새까맣게 지운 둘이 찍은 사진 아래는 #이별스타그램 #외로움 #일상복귀 등 스무 개는 족히 돼 보이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A는 중증이다. SNS 없이는 숨도 못 쉴 여자다. 새삼 2G폰 시대의 연애가 그립다. C(30세, 남)

 

갈기갈기 찢긴 추억

한 달 전에 3년 반 동안 만난 L과 이별했다. 먼저 헤어지자 말한 건 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딱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고, 매번 똑같은 일상과 데이트가 지겨웠다. 변화가 필요했다. 퇴근길에 매일같이 L과 접선하던 카페에서 만났다. 늘 그렇듯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이 한 시간이 흘렀다. 내가 먼저 정적을 깼다. “이러고 있는 거 참 의미 없다. 우리 그만 만나자.” L은 끄덕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L의 소식이 궁금해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프로필 사진이 모니
터에 떴다. 소름이 끼쳤다. 3년 반 동안 내가 찍어준 사진을 모두 갈기갈기 찢은 이미지가 그의 피드에 깔려 있고,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의미한 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그래야 했을까? 굳이 그 많은 사진을 꺼내 찢어발겨야 속이 시원한 걸까? L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그의 피드에 방문하지 않았다. M(32세, 여)

 

이거 퀴즈 게임인가요?

주말 밤 클럽에서 만난 다섯 살 어린 스물세 살 연하남 S와 연애를 했다. 우린 6개월간 신사동과 이태원을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하지만 회사원인 나는 9월에 들어서면서 업무량이 급격히 늘어 그 전처럼 매일같이 S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퇴근 후 그를 만난 어느 날 저녁, S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나는 평일이라 안된다고 했다. “누나 요즘 왜 그래? 그냥 놀자. 뭐 어때. 아프다고 하고 회사 좀 늦으면 되잖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일모레 서른인데 갓 제대해 세상 물정 모르고 뛰노는 애와 마주 앉아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헤어지기로 했고, 그렇게 연하남과 보낸 뜨거운 여름은 추억이 됐다.

어제는 술을 마셨다. S 생각이 났다. 트위터에 접속했다. 엥? 이건 또 뭔가. 온통 초성뿐인 글만 포스팅되어 있었다. ‘ㄴㄱ ㅈㄴㅁ ㅇㅁㄴ ㅈㄴㄷㄱ’, ‘ㅈㄱㄹ ㄴㅃㄴ’. 날짜를 따져보니 분명 우리가 헤어진 날부터 시작된 이상행동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딱 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ㅈㄱㄹ ㄴㅃㄴ’, ‘잘 가라 나쁜 년’. S에겐 미안하지만 풉 하고 웃음이 났다. 연하남은 실연에 대처하는 방법도 귀엽다. 누나는 이만 갈게, 퀴즈 게임은 혼자 하렴. O(29세,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