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촛불집회가 이어진 겨울과 대선을 치른 봄까지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한국 출판계는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 사고로 매일 새롭게 경악한, 소설보다 더 소설 같던 날들 사이에 신간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새 소설 내기를 주저한 출판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대작을 내놓고 있다. 다시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계절이 온 것이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쓰는 사람이 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남긴 문장처럼 김하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시대의 비극을 ‘잊지 않고’ 새 글을 썼다. 각자의 글에는 ‘4·16 세월호 참사’와 ‘3·11 동일본 대지진’의 흔적이 남아있다. 김영하가 7년 만에 내놓은 <오직 두 사람>이 특히 흥미로운 건 소설집에 실린 총 7편 중·단편들의 극단적인 온도 차 때문이다.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소설집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실었고, 그 시간 한가운데 세월호가 있다. 이런 이유로 2014년 6월 이전에 탈고한 작품과 그 이 후 발표한 작품의 결이 완연히 다르다. 예로 ‘옥수수와 나’는 작가가 단 며칠 만에 신나게 써나간, 자신과 호흡이 가장 맞는 작품이라고 밝혔듯 김영하 특유의 블랙 유머가 빛난다. 그러니까 이 단편은 한마디로 ‘재미있다’. 하지만 2014년 겨울에 완성한 ‘아이를 찾습니다’는 확연히 다른 작품이다.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된 남자. 하지만 아이를 찾은 뒤 진짜 지옥이 펼쳐지는 이야기다. 김영하는 이 작품으로 제9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런 글을 남 겼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인의 소설 중 최대 초판 부수인 1백30만 부를 일본에서 찍고, 한국에서 거둔 선인세만 20억(원)이라는 풍문의 주인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도 발행된다. 일본 출간 전 하루키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 센 문학상을 수상하며 이 소설을 두고 “매우 기묘한 소설이 될 것”이라고 남긴 한마디에 책이 나오기 전부터 팬들은 물론 일본 출판계가 열광했다. 무명 초상화가인 ‘나’는 어느 날 일방적인 이혼 통보를 받고 친구의 아버지이자 유명 화가인 야마다 도모히코의 작업실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야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 걸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 후 주인공에겐 기이한 일들이 펼쳐진다. 한밤에 느닷없이 방울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림 속 기사단장이 실제 눈앞에 나타난 것. <기사단장 죽이기>는 판타지 요소와 추리 서사 등 ‘하루키 코드’가 더해진 모험소설에 가깝다. 여기에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과 일본의 관동대학살 등 인류사의 주요 비극적 사건들이 그려진다. 혹자는 ‘거대한 악과 폭력을 경험한 후 인간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루 키식 질문이 1천 페이지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하루키가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인의 의식에 대해 쓰고 싶다’ 는 바람의 결과가 어떻게 풀어질지 확인해도 좋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역시 스펙터클한 모험담으로 돌아왔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젊었을 적의 자신을 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무슨 말을 하시겠어요?’ 라는 문장으로을 여는 과학 모험소설 <잠>. 스물여덟 살의 의대생 자크 클라인의 어머니이자 신경생리학자인 카를린은 수면 실험 도중 실험 대상자가 사망하자 충격으로 자취를 감춘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자크는 꿈속에서 20년 뒤의 머리가 희끗한 마흔여덟 살의 자신을 만난다. 그는 어머니가 말레이시아에 있으며 위험한 상황이니 빨리 어머니를 구하라고 알려준다. 이에 자크가 홀린 듯 말레이시아로 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소설은 1980년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과학 전문 기자 시절에 쓴 자각몽에 관한 르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취재 당시 베르베르는 실제 자각몽을 경험했다고. ‘꿈을 제어할 수 있거나 꿈을 통해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갈 것 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할 소설이다.

화려한 라인업의 마지막은 김애란이다. 동시대 20~30대 청년들 중 그녀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5년 만에 묶은 새 소설집 <바깥은 여름>은 제37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2005년 소설가 한강이 세운 최연소 기록을 깨고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언어가 말살된 미래에 각 종족의 언어를 대표하는 노인들을 모은 ‘소수언어박물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침묵의 미래’는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도 감탄스럽지만, 특유의 유려한 문장은 읽고 또 읽게 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처음 2페이지와 마지막 4페이지를 소리 내 다시 읽었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나 <비행운> 속 원룸과 학원, 편의점 속 슬프고도 명랑한 세계를 지나 저만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예술가의 행보를 같은 시공간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